'선교적 교회'라는 주제에 대하여는 '선교적 교회론/김은홍.정회현/GMD'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중요한 관심사 중에 하나가 교회들이 선교적 교회로 세워지도록 돕는 일이었기에 이 책은 굉장히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선교적 교회와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단지 '선교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좀 더 본질적으로 선교적 교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오늘날 한국교회들이 선교적교회로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GMTC의 원장이신 변진석 목사님의 글이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론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에는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가져다 줄까요?
‘선교적 교회론’이 오늘날 교회에게 주는 도전들 -레슬리 뉴비긴의 통찰력을 중심으로 -
교회역사를 보면 각 시기마다 주목을 받았던 신학적 주제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경우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예루살렘 공의회(행15장)는 이를 다루기 위해 모였다. 그 후 2세기에는 “어떤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 정경에 포함될 것인가?”가 교회의 관심이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이후 공의회들에서는 삼위일체론(니케아 AD325)과 기독론(칼세돈 AD451)이 중심적인 신학적 주제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이 논쟁의 핵심에 있었다. 19세기에는 종말론이 주목을 받았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성령론이나 성경 무오설에 관한 논쟁이 뜨거웠다.
특별히 선교적 교회 개념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교회 성장 방법이나 선교와 관련된 어떤 현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선교”와 “교회”를 매우 심도 있게 다루며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 개념의 핵심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교회는 만민과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부름을 받고 이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론과 선교론을 굳게 결속시키고 있는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이 바로 선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이후 카톨릭 교회와 비교해서 개신교회는 “교회”보다는 “복음”에 대해 강조하는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 이에 대해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는 교회론이 특히 복음주의 신학의 취약점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과 선교를 강조하였지만 그것을 교회론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심도 있게 진행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선교적 교회론은 지난 수 십 년간의 선교학적 발전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개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면서 교회를 배제시키는 일탈(逸脫)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에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일 뿐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목적이요 선교라는 것("the Church is a mission")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야말로 하나님 왕국의 첫 열매들이요, 그 왕국의 “맛보기(foretaste)”로서 하나님의 왕국이 장차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징(sign)이기 때문이다.
레슬리 뉴비긴의 삶과 영향력
이러한 선교적 교회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그것을 근거로 서구교회 안에 “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복음과 우리 문화 네트워크)이라는 하나의 운동을 일으키도록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egin:1909-1998)이다. 그의 길고도 풍성했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시편 92:12-15에 묘사된 의인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에 의하면 레슬리 뉴비긴은 40여년을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인 동시에 신학자이며 성경학자였고, 변증가요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이었으며, 저술가요 선교학자로서 그 경험의 깊이와 넓이의 면에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지오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레슬리 뉴비긴에 대한 평전(評傳)에서 그를 “확신 있는 신자, 담대한 전도자,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창자, 목회적 주교, 선교전략가, 종교간 대담가, 사회 개혁가, 예전적 설교가, 영적 교사, 기독교 변증가”로 소개하면서 그러한 특성들을 보여주었던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신학적 생애(A Theological Life)"라는 제목으로 요약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생애를 오히려 “선교학적 생애(A Missiological Life)"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선교사적 열정”을 가지고 직면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국을 떠나 비기독교권인 동양(인도)에서 오랜 세월 선교사로 지냈을 뿐 아니라 은퇴하여 영국으로 돌아온 후 소위 기독교권(Christendom)인 서양 세계를 선교사적 시각으로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서구의 재복음화를 촉구하며 나섰다. 그는 60년간 이상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책들과 문서들을 집필하였는데 그의 거의 모든 글 속에서 매 페이지마다 선교사 신학자(missionary theologian)로서의 마음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고 윌버트 쉥크(Wilbert Shenk)는 말했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선교적이었으며, 그의 선교학은 매우 깊은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선교사로서의 삶과 사역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문들을 가지고 평생 씨름하면서 선교적 신학(missional theology)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오늘날의 교회와 선교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와 세계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 수많은 이슈들에 관여했는데 선교적 교회론은 그러한 그의 삶과 통찰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을 형성하는데 공헌을 한 교회에 대한 그의 신학적/선교학적 통찰력과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게 주는 도전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교회-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선택 받은 공동체
뉴비긴의 신학과 선교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선택의 교리”이다(George R. Hunsberger). 뉴비긴은 성경이 기본적으로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과 개인들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선택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절정을 이루며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절대적인 배경이 된다. 사실 선택의 교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케 만드는 교리이다. 또 세상 사람들로 부터는 심한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기독교의 교리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시다는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어떤 특정 민족과 집단을 택하시고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뉴비긴이 선교사로 사역했던 인도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많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서부 유럽 사람들이 아직 야만 상태에 있을 때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경전들을 펴냈고 수많은 성인들을 가지고 있던 자신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진리의 비밀을 감추어 놓았다가, 삼천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우리 모두가 그 야만인들의 자손들로 부터 영원한 구원의 비밀을 배워야한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에 대해 뉴비긴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러한 질문을 일으키고 있다고 답변한다. 즉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는 달리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은 개인 영혼의 추구(가령 명상이나 고행과 같은)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는 잘못된 전제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구원은 결국 개인의 영혼과 영원자(the Eternal)간의 관계의 문제이며, 그 주도권은 구도자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독자(the alone)대 독자의 관계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의 삶을 관계적 견지에서 보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 다음에는 가족, 친척, 나라 사이의 관계로 이어지는 가운데 ‘이 땅의 모든 족속들’과 ‘열방’들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비긴은 우리의 상호관계가 포함되지 않은 사적 구원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로서 다루신다. 한사람이 선택되어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고, 한 민족이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심으로 모든 민족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재창조되기를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메신저로 지명된 이웃을 향해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대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자기를 나타낸 사람들을 통해 그 이웃에게 전달됨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우리를 위한 최상의 축복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오지 않고, 역사적 공동체의 연결의 고리를 따라 우리 동료 이웃들의 손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중 아무도 명상이나 참선을 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 탁 떠오르고, 또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과 부활하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임이 깨달아져서 그것을 믿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래서 우리가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는데(로마서 10:9-17),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그 사람도 또 다른 누구로부터 복음을 전달받았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경우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미국으로부터 온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들었고, 미국 사람들을 영국으로부터, 영국을 로마로부터 온 선교사들로부터, 로마는 소아시아로부터, 소아시아 교회들을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되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담지자인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끊임없이 감당해 왔기에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이르렀고, 우리가 그 복음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선교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이처럼 뉴비긴은 선택 교리의 선교적 의미(missionary significance)를 정확히 파악했다. 스코트랜드 장로교 선교사로서 뉴비긴은 전통적 칼빈주의 안에서 선택의 교리가 어떻게 오용되고 남용되어 왔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선택의 교리는 왜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였는지 이유(reason)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purpose)으로 선택하셨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고 있다-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시려는 그의 약속의 전달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공동체로서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이 “나 구원받았네, 너 구원받았네, 우리 구원받았네!”라고 찬양하면서 선택을 배타적 특권으로만 간주하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선교적 공동체로의 특별한 책임을 망각한다면 교만과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미덕이나 성취에 근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받은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 나아가 그 선택의 목적이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함이다”(요15:16)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목적에 의해 선택된 공동체라고 할 때 교회의 모든 관심과 자원을 교회 내의 필요와 유지에만 사용하고자 하는 교회들은 그 선교적 목적과 선교적 특성(missionary character)을 상실한 것이라고 하겠다.
2. 교회 -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창조된 공동체
선교적 교회론은 현대 선교 운동과 더불어 발달한 선교학의 결실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 선교 운동은 선교를 교회의 사명중 하나로만 간주하는 가운데 특별히 기독교권(Christendom)에서 비기독교권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기독교 문화(서구 문화)를 확산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다. 1910년 스코트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선교대회는 이러한 선교운동의 정신과 결실이 드러났던 자리였다. 그 결실 중 하나로 국제선교협의회(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결성(1921)되었는데 레슬리 뉴비긴은 존 모트(John Mott), 존 맥케이(John McKay)에 이어 1959년 IMC의 제 3대 총무로 선출이 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교회의 분열이 복음전파와 선교의 장애물로 어떻게작용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특별히 서구 기독교권에서 일어난 기독교 교파간의 분열이 그대로 선교지에 이식되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고 회복시키신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손상시키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남부 인도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의 연합 과정에 참여하여 1948년 남인도교회(CSI: the Church of South India)라는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들이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하는 것이 “화해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선교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뉴비긴은 선교운동이 필연적으로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야기할 뿐 아니라 교회들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백성인 교회야말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첫 열매로서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관련된 문제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뉴비긴의 사상을 잘 담은 책이 1953년에 발간된 하나님의 권속(The Household of God) 이다. 이 책은 교회론에 있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으로 평가되고 있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교회에 관한 교서(Lumen Gentium)에도 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비긴은 이 책에서 전통적인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의 교회론을 다룬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비롯된 개신교의 교회론은 전시대와 전지역에 걸쳐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하나됨과 연속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별히 루터의 경우는 불가시적 교회를 언급하여 가시적 교회의 연합보다 개인적이고 영적 연합을 말함으로 성경의 강조점을 피해가고자 했다고 뉴비긴은 비판한다.
개신교는 복음과 믿음을 강조하고 주로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말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교회를 통해 복음과 믿음이 전달되어왔고 인류 가운데 존재하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그 기구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이다. 특별히 성경을 강조하는 개신교로서는 예수님이 어떤 책이나 신조, 또는 사상의 체계나 삶의 규칙들이 아니라 보이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남겨두셨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p.25). 한편 카톨릭 교회는 사도적 계승에 의거한 보이는 지속적 구조를 가진 교회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을 함으로 또 다른 측면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에 대해 뉴비긴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카톨릭의 교회론은 종말에 성취될 교회의 상태를 현 역사속의 교회에 잘못 적용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이지 결코 자의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여’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별도로 자신이 어떤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카톨릭 교회의 생각은 성경적 용어로 표현하면 매우 ‘육신적’인 징표이다.(pp.107,108). 카톨릭 교회의 교회론의 가장 ‘육신적’인 면은 사도적 계승을 교회됨의 필요조건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교회됨의 유일한 충분조건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의 교회론에 관한 논의에 이어서 뉴비긴은 오순절(Pentecostal) 교회의 교회론을 기독교의 제 3의 흐름으로 제시함으로서 선각자로서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오순절 교회는 “성령께서 능력으로 현존하는 것이 인정되는 곳”이라고 대답함으로 교회는 다름 아닌 성령의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교회는 복음 메시지에 대한 신실함이나 사도적 계승이 있는 공동체로 정의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의 살아있는 능력의 존재 여부가 교회 규정하는 더 본질적 요인이라는 것이다(p.112).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살아있는 능력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모조품이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p.124). 성령의 교통(kononia)하심의 역사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성령이 공급하시는 은사들과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p.136). 이러한 성령에 대한 강조는 그의 선교신학이 기독론이나 교회중심이 아니라 성령론 중심의 선교신학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D. W. Little). 선교란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라기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서 교회는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선교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여 새로운 창조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의 일차적 대상이요 결실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이 세상 속에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하나님 왕국의 표징(sign)이요, 맛보기(foretaste)이며 도구(instrument)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선교이다.
뉴비긴의 이런 통찰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준다. 교회는 이 세상에 가시적(visible)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의 기관인 동시에 하나님께 부름 받고 구속받은 백성의 공동체임을 일깨워준다. 교회는 사회적 조직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선교적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영적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 왕국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뉴비긴의 통찰력은 우리 교회가 자신을 성령의 피조물로서 인식하는 가운데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성령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으며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그 인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나아가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로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결속을 유지하여야 한다. 교회의 분열은 그 자체가 교회의 증거를 약화시키며 그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고, 성령께 받은 은사로서 서로 봉사하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선교를 자신의 사업이나 프로젝트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인 것을 인정하고 성령의 주권을 인식하는 가운데 성령과 더불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선교적 공동체(행1:8)가 되어야함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3. 교회-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종말론적 공동체
선교가 교회의 하나의 기능(function)이 아니고 교회의 본질(nature)이며,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관이기 이전에 교회 자체가 선교라는 선교적 교회론의 주장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자체가 선교라는 것을 잘못 강조하여 세상 속에서의 역할을 무시한 채 오로지 모든 것을 교회 중심적으로 돌려놓는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독교권에서 비기독교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형성된 종래의 선교 개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지역 자체가 선교지가 된다는 생각을 강조한 나머지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에 대한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선교적 교회론의 기초를 제공하였던 뉴비긴은 그의 생애를 통해 시종일관 타문화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대위임령이 교회가 받은 명령의 중심에 서있으며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교회는 “보편적(catholic)"이고 “사도적(apostolic)" 교회라는 이름을 주장할 권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1년 IMC가 WCC에 통합되면서 세계선교 및 전도 분과(DWME: the Divi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로 편성되었을 때 그 분과의 초대 대표와 WCC의 부총무로서 뉴비긴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부에서 타문화 선교의 중요성과 필수성을 주창하는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그는 WCC의 기관지인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의 편집장으로서 그 잡지의 명칭에서 ‘s'를 제거함으로 기존의 좁은 의미에서의 선교 개념(missions)이 아니라 교회가 해야 할 근본적 사명으로서의 총체적 선교(mission)만을 강조하자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가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s'를 고수하고자 했던 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선을 넘어 복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명백한 의도를 가진 타문화 선교의 중요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유지하고 촉구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뉴비긴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교회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교회의 본질은 선교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전망에서 바라보아야만 바르게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으로 정의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목표로 움직여나가고 있는 종말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땅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보냄을 받은 순례자적 공동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뉴비긴은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이 성장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 구별하여 신속한 성장(rapid growth)보다는 신속한 확산(rapid spread)이 더 중요함을 지적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믿는 자들이 더해짐으로 기쁨이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가 생겨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모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 모든 민족들과 문화 속에 존재하는 인간 공동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이 역사의 참된 목표에 관해 듣고, 믿고, 자유로이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함은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자신은 예수님이 역사의 실마리이며 그 근원이자 목표가 된다는 것을 더 더욱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 사역을 계속함에 따라 새로운 민족들이 새로운 보배들을 교회의 삶에 더하게 함으로(계21:24) 기독교는 인류의 통일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 왕국의 맛보기로서 계속 자라고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교회는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맞아들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며 완성되어가는 존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모습(엡2:19-22)은 오직 선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뉴비긴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전 성도들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했듯이(히11:39-40) 우리 또한 우리 뒤에 따라올 믿음의 세대가 없이는 교회로서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타문화선교를 등한시한 채 오로지 개교회의 성장, 그것도 미래 세대를 간과한 채 현재적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는 많은 교회들은 보게 된다. 이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왕국의 성장과 완성에 대한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교회가 아무리 크게 성장하고 한 시대 속에서 영향력을 키운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의 교회로서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땅 끝까지,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선교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결론>
선교적 교회론은 짧은 시간 내에 북미주를 중심으로 한 서구 기독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는 얼마만큼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아직 평가하기 어렵다.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는데는 무엇보다 지도자들의 의식과 영향력이 중요한데 뉴비긴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재의 신학교 교육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그야말로 회중을 먹이고 돌보는데 치중하게 만들 뿐 회중으로 선교적인 소명을 회복하고 전 삶의 영역에 나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무장시키는데 너무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교회가 자기만 챙기는 교회 중심적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보여주는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선교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주는 신학적/선교학적 통찰력이 절실하다. 레슬리 뉴비긴이 선교사의 삶과 경험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선교적 신학을 재형성함으로 서구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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