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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휘튼선언(The Wheaton Declaration)

discipler 2007. 5. 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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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966년 4월 9일-16일에 열렸던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에서 채택된 휘튼선언이다.(원문 보기)


서언
휘튼선언은 세계각국으로부터 온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8일간 모였던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the 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의 참석 대표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그 회의의 배경과 목적, 기대 및 성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이스 킹' 공동의장은 선언문 낭독에 앞서 대표자들에게 연설했다. 킹은 이 회의에 71개 국가들로부터 938명의 공인된 대표자들이 등록했다고 말했다. 間교파 해외선교 협의회(the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와 복음적 해외선교 협의회(the Evangeli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 에 속한 백 개의 부서들이 대표를 보냈다. 모인 협의회에 속하지 않은 50여 개의 다른 기관들(agencies)이 대표자들을 보냈다. 그 외에 39개의 특별한 선교관심그룹, 14개의 비-북미 기관, 그리고 55개의 훈련소(schools)가 참여했다. 회의는 에큐메니칼적이며 평화적이었고, 역사적 정통성의 맥락(context)내에서 견해를 밝히기로 결정했다.

킹 의장은 선언문이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지식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선언은 단지 시작일 뿐이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감(insights)을 주실 때 복음주의자들이 그것들을 고찰함에 따라, 수정되고 변화될 수밖에 없다. 이 선언은 우리시대의 특정문제들에 영향을 받았고, 그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하는 상황은 분명히 더 많은 회의와 도 다른 선언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대표자들이 선언문 내용 하나 하나에 모두 동의할 것을 기대하거나 그들이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선언문은 회의의 하나의 합의된, 그리고 종합된 의견의 최종적인 형식이다. 결론들은 정택 방침서 들을 가지고 토론한 대표자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최종원고 작성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넘겨졌다.

본래적인 한계성으로 인해, 이 회의는 현재 관심이 되는 중요한 몇 가지 주제를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과 평화 문제가 토론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의제에 상정되지 않았다. UN의 역할과 중국의 UN과 세계와의 관계는 제외되었다. 회의는 의도적으로 그 토론과 선언을 사전에 동의한 10가지 주제로 제한했다.

선언문은 그 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대표자들을 보낸 기관들을 얽매지 않는다. 선언문은 회의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의 표현으로 전달된 대표자들이 속한 기관들과 나머지 기관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기관은 그것을 연구하고, 진술들을 검토하며, 그 안에 포함된 진리를 확신할 때 그것들을 수용하고 실천하도록 요청된다.

선언문 채택후에, 대표자들은 엄숙하게 한 목소리로 이 세대내의 세계복음화라는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과제를 성취하도록 자신들을 결속하는 서약(the Covenant)을 복창했다. 그들은 영속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성령께서 회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그리고 세계를 향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마틴 루터가 작곡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휘튼 선언문

1966년 4월9일- 16일에 일리노이주 휘튼에서 소집된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the 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에 참석한 대표자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어떤 시급함이 일천명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대표자들과 종들로 하여금 이 교회의 세계 선교에 관한 회의 (the 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를 소집하도록 촉진시켰는가? 현재의 어떤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함께 모여서 진지한 연구와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는가? 무엇이 포괄적인 선언문을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의 후원자에게로, 갖가지 장벽을 넘어서 동료 신자들에게로, 그리고 불신앙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대담성을 보장하는가? 모든 곳의 기독교인들이 직면하는 어떤 도전, 어떤 문제들이 이전 종류의 반사작용과 반응을 강요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진지하고 자세한 대답을 시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교회안에서의 그분의 영광을 위한 열성적 주의, 인간의 영원한 복락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부터 말할 수밖에 없다.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확실성이 요구된다...
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어떤 이들은 이 변화의 시대에 있어서의 성서적 증언들의 타당성에 확신을 못가진다. 왜 우리는 마음과, 힘과 재원을 이 발전해 가는 세대의 모든 족속과 민족과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의 선포에 쏟아야 하는가? 이 불확실성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성서적 선교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선언문을 작성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확실성을 분명히 해야한다.

헌신이 요구된다...
방해하는 세속적 힘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선교 목적을 향한 헌신을 좀먹으면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점점 더 다루기 힘들어 가는 다루기 힘든 세계”로부터 뒤로 물러나 대가가 필요한 전진을 향한 호소에 귀를 닫아 버리고는, “왜 과거의 성과에 만족해 하지 않을까? 어쨌든 교회는 이제 전세계에 퍼져있다. 신생교회들로 하여금 그 과업을 끝마치게 해야지.” 라고 합리화한다. 우리는 성서의 조명아래서 솔직하게 자기를 반성하고 우리 마음가짐을 남김없이 드러낼 필요가 있다. 개선책의 응용이 자기 점검에 뒤따라야 한다. 상황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뒤따라야 한다. 상황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우리 헌신의 깊은 갱신과 성령께서 우리와 그분의 교회안에서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만일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하고자 하는 자발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소명을 발하고 유의해야 한다.

분별이 요구된다...
개신교는 교리적 불확실성, 새로운 신학사조, 공공연한 배교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탄은 거짓증거를 조장하여 의심을 퍼뜨리고 참된 신앙을 파괴하려고 밀밭 가운데 엉겅퀴를 뿌리는 일에 열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 영들에 대한 분별”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 평화, 그리고 하나됨을 수호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훈련과정을 이행하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악과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
 
소망이 요구된다...
세계는 격동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점점 강해지며 공격적이 되고 있다. 특별히 공산주의 같은 정치적 운동들은 집단적 인간의 숭배를 요청한다. 그들은 어떤 “신”의 도움 없이도 인간은 사회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호언한다. 그들은 자주 다시 부흥하는 그리고 확장에 있어서 전투적인 고대 민속종교들로 발을 묶고 행진한다. 僞기독교 의식들은 영적 귄위를 향한 인간의 선천적 욕망을 양식삼아 증가하고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도전이 성서적 기독교에 충실한 교회들에 직면하고 있다. 갈등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에 대한 증대하는 적대감의 상황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충분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소망의 선언이 긴급히 필요하다. 우리는 그 소망을 선포해야만 한다.

확신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대를 다스리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복음의 진보와 역사속에서의 그분의 승리를 믿는다. 우리는 교회와 민족가운데서 그분이 은혜롭게 사역하시는 수없는 증거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 우리는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증인들이 있음을 믿는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 : 14). 성서는 그분의 참된 교회로부터 나온 모임이 완성될 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그분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엡1:10, 빌) 우리는 이 확신을 단언해야만 한다.

고백이 요구된다...
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전세계에 걸친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 형제자매, 신앙의 세계 가족에게 말한다. 비록 그들처럼 우리도 “주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안에서 우리의 사역의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 우리는 우리로 종종 세상의 관심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대처하는 것을 막는 세상으로부터의 비성서적 격리에 대한 죄인이다. 기독교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일의 진척과 대중성에는 너무 많이 의존하는 반면 지속적인 기도와 성령에는 너무 의존하지 않는다. 우린 자주 타당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우리는 외향적인 복음 증언과 높은 윤리적 관심의 그리스도인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를 용서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좀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서의 조명아래서 과거의 사역에 대한 솔직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종종 다음과 같은데서 실패했던 사실을 발견한다 :

우리 주님 재림의 복된 소망을 개인적 성결과 선교적 열정의 자극제로서 충분히 강조하는데 있어서 수용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를 늘리는 과제의 전략적 중요성을 어떤 적절한 방식으로라도 분별하는데 있어서 새롭게 생겨난 회중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리더쉽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실패함으로 온정적 간섭주의를 지속시켜 국가교회와 선교 단체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을 야기시킨 것 인종차별, 전쟁, 인구 폭발, 가난, 가정 파탄, 사회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같은 문제에 성서적 원리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인 행정구조의 중복의 제거하고 우리 손길이 닿는 범위를 넓히는 협력형태를 촉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러한 실패들은 우리에게 이 객관적인 평가와 성서의 교정하는 권위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고백을 해야 한다.

복음주의적 합의가 요구된다...
우리의 실패를 점검하고 수정하는 것외에, 우리는 성서적 기독교의 유일성과 궁극성에 도전하는 종교적 움직임들을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회의는 그것들이 우리의 성서적 신앙에 제기하는 구체적인 위협에 대한 더욱 심도있는 통찰과 균형잡힌 사고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소집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 바뀐 그 외적 입장과 내적 조직 그리고 개방적인 대화를 위한 명백한 욕구로 말미암아 그 조절된 그 이전의 폐쇄성은 우리의 신중한 평가와 반응을 요구한다. 현대 개신교 운동, 하나님에 의한 계시된 복음의 비실재를 대담하게 주장하고, 영원한 심판을 부정하는 新보편주의를 퍼뜨리며, 공격적 복음전도를 교회간의 화해사역으로 대치하고, “교회”와 “선교”, “카톨릭”과 “개신교”사이의 성서적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세계 종교의 단일화의 방향으로 교회의 조직을 창출하고 있는 현대 개신교운동도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반응을 요구한다. 新 기독교 의식들, 배우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전복하려는 강렬한 노력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양하는 자신들의 기만적 과시속에서 영적 권위를 향한 인간의 선천적 욕망을 양식삼는 그들도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반응이 요구된다. 비기독교적 종교조직, 새로운 선교적 열정속에 있는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 같은 비기독교적 종교조직들이 기독교의 성장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오고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반응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 합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권위…
앞서간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을 성서, 즉 영감으로 되었고 유일한 귄위이며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한다. 성서는 신앙과 생활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 규율을 구성한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더군다나, 신약성서는 선포(케리그마)와 봉사(디아코니아)간의 조화에 대한 사도적 규범(norm)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단지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성서의 조명아래서 우리의 말들을 숙고하고 나아가 그 말들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바란다.

복음…
우리는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을 핵심적으로 여긴다. 복음은 우리 시대에 있는 모든 족속과 민족, 나라의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지상 과제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복음”에 대한 기술을 받아들인다. 복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인 삶에 들어와 있다. 복음은 역사속에 등장했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일한 방식으로 행동하신, 神一人이신 나사렛 예수에 관계된다. 비록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몸으로 부활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의 속죄물로 그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안에는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으며, 그분의 현존과 그분과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즉 그리스도 중심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회개)와,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과 그분의 주권에 대한 복종으로 초청한다. 이 “복음”의 선포는 그 핵심에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3:7)라는 분명한 명령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아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만일 인간들이 거듭나지 않으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이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세계선교와 특별히 관련된 결정적인 문제들에 관해 입장을 밝힌다.

[선교-그리고 혼합주의]

깔려있는 문제들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보편성의 시대에로 나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과 더불어 이 작아지는 땅덩어리 위에서, 많은 목소리들이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종교를 요청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타당성을 지니고 잇는 메시지이다. 우리의 목적으로 볼 때 혼합주의는 성서적으로 계시된 기독교의 진리와 그것을 부정하는 비기독교적 종교들이나 기타 다른 사상체계의 다양한 혹은 반대되는 교의와 실천을 통합하거나 화해시키려는 시도이다. 동서양의 종교에 수용될 수 있는 비인격적 유신론을 옹호하는 기독교국 내에 있는 비정상적이고 이단적인 입장은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한 혼합주의는 기독교 진리의 독특성과 궁극성을 부정한다. 헌합주의는 복음이 거의 이해되지 않았거나 경험하지 않은 곳에서 손쉽게 발전되기 때문에, 성서에 계시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 구원사역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고도의 명료화가 추구되어야 한다.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넘어서서 복음을 효과적이고 타당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집어넣는, 본질적 복음의 진리에 속하지 않는 문화적 첨가물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진리는 그들도 복음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의미 있고 적절한 그 민족의 언어적, 문화적 관점을 배경으로 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합주의에 저항해야 하며 겸손과 위엄을 가지고 우리의 증언을 해야 한다.

성서의 증거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행위에 대항해서 증거하는데 단호했다. 신약의 사도들 또는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영지주의같은 당시의 혼합주의적 경향과 대항해 싸웠다. 한분이시고 유일한 진리의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기록된 말씀인 성서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중심적 요의이다. 성서적 신앙은 독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무엇을 첨가한다거나,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그것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1,2)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기독교신앙을 전파함에 있어서 더 큰 효과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궁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혼합주의의 위험을 부각시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전파함에 있어서 기독교 진리를 모호하게 할 비성서적인 문화적 첨가물이나 강조점을 피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들이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그 속에서 살아가며 봉사하는 종교적 신념과 사상체계에 우리의 전적인 지도력을 좀 더 신중하게 알릴 것이다.

[선교-그리고 新 보편주의]

깔려있는 문제들
교회사 처음 19세기 동안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가르침도 모두 이단으로 강력하게 거부되었다. 오늘날에는, 보편주의가 일단의 지도적인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자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의 주류속으로 급속히 유입되고 있다. 많은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점차적으로 이 입장을 옹호한다. 신보편주의는 성서가 전적인 전체성과 맥락에서 제시하는 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단편적 사용에 근거한다. 우리가 거부하는 보편주의는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주관을 가지고 사랑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편주의는 지금이나 앞으로 하나님이나 인간에 의해서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인류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통일성을 선포한다. 모든 인류가 “화해”되었다 ;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만나지 못한 자들보다 유익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니다. 비록 사람들이 이생의 삶에서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심지어 복음을 거부하더라도-그들의 죄와 형벌은 궁극적으로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보화를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보편주의의 문제는 단지 인간 이성을 성서의 분명한 증거와 성서적 기독교위에 올려놓았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선교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보편주의자들은 단지 그리스도의 보편적 주되심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삶속에서 인정할 것을 설교한다. 이것은 쉽게 선교적 소명을 가진 교회에 의한 혼합주의와 궁극적인 자포자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그분의 친구라고 부르는 자들에 의해 배신당하고 있다.

성서의 증거
우리는 성서가 주장하는 바 보편적인 특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요3:16) ; 그리스도는 온 세상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요일 2:2) ;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골고 1: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딤전2:4),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이 통일되기를 바라신다(엡 1:9,10),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입이 그분을 주라고 시인하도록(빌 2:10,11).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그러나 성서가 성서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도 가르치셨다. 그분은 복있는 자들에 관해서 뿐만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셨다.(마25:34,41,46).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파멸과 주의 앞에서 추방을 가르쳤다(살후1:8,9). 비록 하나님의 요청이 보편적이며 그의 승리가 보편적일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다(요1:12). 천국과 지옥은 존재한다 ;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존재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죄악과 불신으로 인해 영원히 잃어버린 바됨의 끔찍한 현실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선포하고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더욱 솔직하고 철저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이 영원한 형벌과 구원과 화해의 부르심에 대한 성서의 주석적 연구에 더 힘쓰도록 격려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교회의 선교는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죄가 사함받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위탁하기 때문에, 가난한자, 병든자, 곤핍한 자, 억압받는자 들을 위한 우리의 봉사는 그분에 대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 보편주의에 대한 거부는 모든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가운데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복음을 전파하게 한다.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는 거부하는 바를 실제로는 인정하는 것이다.

[선교-그리고 개종주의]

깔려있는 문제들
“개종주의”(proselytism)라는 말은 “특히 어떤 종교적 종파나 혹은 어떤 견해, 체제, 또는 당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말은 또한 최근에 어떤 교파라도 그 교파내와 교회의 역동적 증언에 대한 반동으로, 어떤 종교 집단과 민족주의적 세력들은 “개종주의가 통제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강요된 전향, 또는 비윤리적 수단(물질적 혹은 사회적)의 사용을 포함하는 개종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되기에 성서적이고 참된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서의 증거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 사도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받아들여, 그들의 오래된 종교적 충절을 버리고 기독교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행 5:29 ; 8:4; 13:15-41 ; 18:4-11 ; 19:8).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었던 유대인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모두 회개하고 믿으며 세례를 받도록 권면했다 ; 그런 후에 그들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그리스도를 따른 모든 자들은 그들의 동료들을 제자화해야만 한다. 이 명령으로부터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교회와 정부의 지도자들이 어느 곳에서도 박탈당할 수 없는 완전한 종교적 자유의 권리를 위해 일할 것을 촉구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유뿐만아니라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협력을 널리펴고 변화시키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기독교국가 안팎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증거를 억누르려고 하는 독점적 경향에 저항함에 있어서 인간들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종교적 충절을 변화시키려고 설득함에 있어서 비성서적이고 비윤리적 방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 비록 그들이 어떤 교회나 다른 종교에 속해있다고 할지라도, 이 회심을 위해 힘 쓸 때 우리는 성서적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그리고 新 로마카톨릭주의]

깔려있는 문제들
개신교와 희랍정교회, 유대교, 그리고 세속세계등과 로마카톨릭의 관계에 새로운 분위기를 이끌어내온 주목할 만한 변화가 로마카톨릭교회내에서 생겨났다. 일찍이 분명하게 선이 그어졌던 차이들은 이제는 분명치 않아졌다. 이런 혁명적인 시대에, 교인들은 점차적으로 우리시대 인간의 문제들을 협력하여 해결하도록 카톨릭과 개신교의 갱신을 요구하고 있다.

제2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갱신에 대한 열망을 가속화시켰다. 성서연구에 대한 새로운 강조들이 로마카톨릭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문제를 제기했다. 카톨릭교회 당국이 세계선교활동 강화 요구에 대해 지금처럼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은 사변적 보편주의와 실존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들은 또한 개신교도들을 “분리된 형제들”로 생각하며 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바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의 실천적 측면이 변할 수 있을지 모르는 반면,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는 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로마카톨릭의 입장에 따르면 교회의 재연합은 교황의 교지에 근거해야만 한다.

비록 로마카톨릭 교회가 성경에 대해 높은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고 할짜라도 전통은 여전히 결정적인 권위를 갖는다. 로마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개혁은 단지 미사 형식의 개혁일 뿐이다. 마리아나 교황의 무오성등과 관련된 비성서적 교리들은 하나도 포기되지 않는다.

성서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성직제도와 성만찬 중시제도에 대한 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 하나님으로부터 온 무오한 계시로서의 성서(sola scriptura)(딤후 4:15-17)
-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십니다.(딤전2:5)
- 그 희생을 다시 드릴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히10:14)
- 행위에서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sola fide)(롬 1:17 ; 3:20-26)
-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직(벧전 2 : 5, 9 ; 히10 : 19-22)
- 마리아 자신도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눅 1 :46-48)
- 주의 만찬을 수행할 때 그 재료들은 형식과 본질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로 남아있다.(고전 11 :25-26 참고 고전10 :17)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교회인 그몸의 유일한 머리이시다.(엡1:20-23)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로마카톨릭 안에서 성서가 더욱 폭넓게 사용되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는 성서를 연구하는 모든 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신앙을 인도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카톨릭 가운데 증거할 수 있는 작금의 특별한 기회들을 포착하도록 촉구한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성서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원리의 영속하는 타당성을 재확인할 때, 우리는 로마카톨릭 교회를 “우리의 큰 자매 교회”라고 여기는 것의 위험성을 인식한다.

[선교-그리고 교회성장]

깔려있는 문제들
교회의 사역은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지역사회에 성도들의 모임을 심는 것이다. 이 사명의 수행이 다음의 것들로부터 저해를 받고 있다.

- 성령의 권위와 전략에 대한 민감성이 너무 부족
- 지나치게 많은 선교적 통제
- 유급 사역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 거대한 평신도 집단에 대한 훈련과 활용이 너무 부족
- 더 큰 응답이 요구됨에도 오랫동안 작은 결과들에 무사안일하게 만족
- 수용적 민족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용하는데 있어서 실패
- 교회 확장은 희생하며 제도적 장치에 대해 지나친 강조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기존 교회 가까이에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넓은 지역들이 여전히 발견된다. 소수의 성도들의 모임만을 갖고 있는 도시의 광범위한 부분들이 점차적으로 복음에 반응을 보인다. 교회가 늘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이미 기존 교회안에서 영적 사역을 계속 수행해 나갈때라도 여전히 교회성장의 역동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 한다. 그러나 선교사의 특별한 사역은 새로운 성도의 모임을 심는 선봉이라는데 있다.

성서의 증거
사도행전에서 지역의 성도들의 모임은 복음의 광범위한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일차적인 대리인들이었다.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복음전파에 있어서 교회의 인력과 자원의 총체적인 동원은 세계복음화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행 17 :1-4 참고 살전 1:8, 9 ; 엡4:16)교회개척은 모든 다른 선교사역-그것들이 필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 가운데 최우선 과제이다. 사도행전의 진행은 성령의 지배가운데 있는 지역교회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행 14 :23, 롬15:14), 실제로, 가끔 지역교회는 영적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진을 계속했다. 처음부터 교회들은 스스로를 다스리고, 지지하며, 번식해 나갔다.(행19:10, 20)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성령을 확신하고 의지한다는 것을 다시 단언하며 교회들로 하여금 성장과 선교를 위하여 필수적인 그 부흥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 선교단체, 훈련기관들이 성서에 제시되는 바의 교회의 본질과 사역, 성장에 관해 성실하게 연구해 주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세계도처에 있는 자국민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들이 성장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내고 그러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선교정책이 간과되고 있는 교회성장의 기회들을 평가하고 우리 단체들의 역할, 방법, 비용들을 복음화와 교회 성장에 있어서의 중요성에 비추어 살펴보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복음에 유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야를 많은 일꾼들로 강화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덜 응답적인 밭들을 조기에 추수할 수 있도록 신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돌보지 않는 채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

[선교-그리고 해외선교]

깔려있는 문제들
일찍이 유례가 없는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시급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선교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는 그를 파송한 교회에 우선적으로 충성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롭게 설립되어서 그가 섬기고 있는 자국 교회가 우선인가? 파송한 교회로부터 오는 기금들은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그러한 기금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교회들은 완전히 자립해야 하는가? 교회와 선교조직은 엄격히 분리된채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선교조직은 그 정체성을 잃어야 하는가? 문제는 현재 수행되는 선교사역이 성서와 일치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성서적 근거에 입각해서 그 지역 자국 교회의 조직으로부터 분리된 파송 기관으로서의 선교단체 개념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고는 “해외 선교사”라는 독특한 사역을 말살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강조는 기독교 청년층의 선교소명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

성서의 증거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교회는 전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할 지속적인 책임이 있다.(마28:18-20 ; 행 13 : 1-4)
신약성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 나아갔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더해졌다(행 8:12, 11:21, 24). 새롭게 개종한 자들은 회중가운데로 모여들어 거기서 그들은 교제를 발견하고 은총가운데서 성장했다(행2:42 ; 9:31).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사도, 선지자, 복음전파자, 가르치는 목회자들을 주셨다(엡4:11). 사도들은 교회를 설립했다 : 그들은 가르쳤고, 지역 지도자들을 뽑는데 조언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딛1:15) : 그들은 교회를 강화시켰고 권고하였다(행 14:22; 15:41) ; 그들은 지도자들에게 직분의 특별한 책임을 맡겼다(딛전 1:18;3:1-14) ; 그들은 또한 훈련과 교리의 문제를 지도했다(고전, 행15). 성령은 오늘날도 선교사들을 통해서 똑같이 역사하신다. 신약성서에서는 어던 분명히 정의된 교회-선교 관계의 구조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이 목회 또는 선교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역할을 규명하고 비젼을 확장시키도록 격려한다. 교회와 선교의 바른 관계는 이 세대가 가기전의 세계복음화라는 교회의 선교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협력적 동반자 관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선교 단체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증가시키며, 현존하는 교회를 강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지역에 설립된 교회와 선교기관 사이에 지속적인 구별이 있음을 인정한다.

[선교-그리고 복음주의적 하나됨]

깔려있는 문제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세계선교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 주님게서 그 교회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하신 진정한 탄원은(요17)세계안에서의 교회의 본질적 영적 일치와 그 가시적 표현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그의 관심은 “세계가 당신이 나를 보내신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많은 목소리들이 그 교리와 실천(신앙과 직제)을 희생하면서 조직적인 교회연합을 요구한다. 교파의 분리는 우리시대의 엄청난 “불명예”로 보여진다. 연합이 주목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조직적 교회연합 그 자체는 신선한 선교적 역동성이나 선교사 충원의 쇄도를 거의 만들어내지 못한다.

성령에 의해 거듭났고 근본적인 복음주의적 교리에 동의하는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들이 다른 교파에 속해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성서적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성서적 하나됨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나 근본적인 복음주의적 교리에 이견을 보이는 자들 가운데는 비록 그들이 하나의 교파에 속해있다 할지라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세속적 차이들과 개인적 불만들 때문에 이 성서적 하나됨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 ; 따라서 서교적 진보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성취는 방해를 받아왔다.

성서의 증거
교회 일치의 본질에 관하여 우리는 성서로부터 배운다 :

- 교회의 일치는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요17:21 ; 엡4:3-6).
- 교회의 일치는 본질의 일치요, 각 구성원들이 새로운 본질
- 성령안에서의 생명-을 부여받은 거듭난 공동체이다.(요 3:6 ; 고전 12:13 ; 고후5: 17 ; 벧후1:4).
- 교회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중심을 둔 신앙의 일치이다(고전 15:1-4 참고 갈1:8 ; 엡4:12-6;골1:27-29).
-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세계 선교 목적을 성취하는데 본원적인 것이다(요17:20,21,23;엡4:16;빌1:27).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의 구조적 관계에 있어서는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그몸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다. 우리는 세상이 믿도록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켜나가기 위해 힘 쓸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선교단체들 가운데 있는 복음적 유대의 조직을 국가적, 지역적, 국제적 차원에서 격려하고 지원할 것이다.

우리는 행정의 중복을 제거하고, 인사문제와 자원의 더욱 능률적인 청지기직을 창출하게 되고 그 사역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복음주의적 선교의 통합을 장려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이 같은 소중한 신앙을 가진 기존하는 그룹이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곳에 새로운 교회 또는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피하라고 경고한다.

[선교-그리고 평가방법]


깔려 있는 문제들
지적 진보의 새로운 시대는 선교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하는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우리는 새로운 대중들과 직면하고 있고, 대중 전달매체의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왔으며 사회 과학의 새로운 지식의 소용돌이 속에 사로잡혀 있고 인간의 하나님과 자기자신,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무서운 소외감을 감지하고 있다. 교회와 선교는 이 소용돌이에 영향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 인간학, 사회학, 사무경영 등의 통찰들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통찰들의 사용을 종교적인 것에 대한 세속적인 것의 그릇된 침투라고 여긴다. 그들은 그러한 진행과정들의 조명아래 개인적 조직적 행위를 평가하려고 질문한다.

성령아래서 커뮤니케이션의 훌륭한 원리들이 문화적 사회적 양식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결합되어 복음의 선포에 응용될 때 최선의 결과가 나타난다. 성령을 최소화하거나 배제하는 기술과 지식에 대한 지나친 의존의 커다란 위험을 초래한다. 선교 방법론은 인간학적 사회학적 견지에서만 평가될 수 없다. 두 영역이 포함된다 : 하나님의 거룩함과 구속적 목적을 반영하는 교회 ; 그리고 유한하고 죄된 인간을 반영하는 문화. 그러므로 사회 과학이 선교방법들에 고려할 만한 통찰들을 제공하는 반면, 그것들을 성서의 교정해주는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성서의 증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과 봉사를 평가하는 자신의 본을 남기셨다(요17). 그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중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임을 알았다 ;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들로 그들의 본을 따르도록 요청했다(고전4:17 ; 11:1 ; 11:1 ; 빌3:17 ; 딤후1:8, 13 ; 2:2,7 ; 3:10-15). 그들의 복음전달은 유대인들, 야만인들, 그리고 지적인 그리스인들에게 문화적으로 적절했다(행13:14-43 ; 14:8-18 ; 17:22-31 ; 고전19:19-23). 성서는 권위를 가진 조직과 대표자들을 인정한다(행6:2-4). 성서는 조직과 사역의 방법들을 구체화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결과들을 낳기 위해 우리가 성령에 의지할 것을 강조한다(고전2:1-5).

그리스도는 인격적인 행위와 복음전도 방법을 통해 제자들을 철저히 가르치고 훈련시키셨다. 그분은 또한 그들에게 성령의 사역의 필요성을 가르치셨다(눅24:49 ; 요15:5,26,27 ; 16:7-15).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적 소명의 모든 면에 있어서 성령에 전적으로 의지해야함을 인정한다. 복음화와 교회개척을 위한 하나님의 원초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람들의 사역이다.

우리는 성서와 현대적 통찰의 조명아래서 주기적인 자기비판에 참여할 것이며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좀더 효과적인 방법들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더욱 잘 전파하기 위해 間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 대한 폭넓은 독서와 연구를 촉구한다.

우리는 개인적 증거를 희생하며 대중매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우리 자신을 지키면서 복음전파를 위한 모든 수단을 최대로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성서지식과 영적 준비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반면 모든 선교사들과 후보자들이 매스커뮤니케이션, 인간학, 그리고 사회학 같은 영역을 공부하도록 장려한다.

우리는 오늘날 세계의 청년대중을 복음화하고 그들에게 영적 성숙을 가져다 주기위한 좀 더 효과적인 수단들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사 채용기술을 증진시키고 선교사의 교육적 준비수준을 높이고 중도 포기율을 줄일 필요가 있다.

[선교-그리고 사회적 관심]

깔려있는 문제들
18,9세기에는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관심에 주도적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많은 이들이 성서적 관점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사회적 공동체적 책임에의 충분한 참여가 없는 개인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제한해왔다.
신학적 진보주의와 인본주의가 역사적 개신교 교회에 침투하여 “사회복음”을 선포했을 때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사회참여와 복음증거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한다는 자각이 늘어났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을 점차적으로 자신들도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엄청난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본, 그분의 강권적인 사랑, 자기들의 인류와의 동일시, 그리고 복음주의 속성의 요구로 인해전인적 요구에 관심을 갖는다.

복음주의자들은 개인구원의 복음을 선포함의 우선성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이 사회적 관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을 얻기위해 성서를 의지한다. 성서의 증거
구약성서는 사회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미6:8). 우리 주님은 교훈과 본보기를 통해 인간의 영적 요구 뿐만 아니라 육체적, 사회적 요구를 위한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마5-9). 예수님의 사마리아사람에 대한 태도는 자신을 인종적, 사회적 문제에 관련시켰다(눅9:51-56 ; 요4:1-30 ; 눅10:25-37)

그분의 제자들은 구분의 본을 따랐다(갈2:10 ; 골3:11 ; 약1:27 ; 2:9-11). 그들은 시민정의를 증진시킴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가르쳤고 그 역할을 존중했다(롬 13 ; 벧전2).
두 큰 계명은 이러하다 : “주 너의 하나님 ??? 그리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29-31).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복음선포의 우선성을 거리낌없이 재단언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회정의와 인간복지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선전할 것이다.

복음주의적 사회 행동은 가능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포함할 것이다. 복음주의적 사회 행동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경쟁을 피해야만 한다. 기독교 기관들이 더 이상 분명히 복음주의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그것들은 포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전세계에 걸친 인종간의 평등, 인간자유, 그리고 사회정의의 모든 형태들을 위해 개방적이면서 굳건하게 설 것을 촉구한다.

[선교-그리고 적대적 세계]

깔려있는 문제들
세상은 교회에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휴식중이 아니라 전쟁중이다. 주님의 예언처럼 신실한 교회는 언제나 적대감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있어서 이 적대성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민속종교의 부활, 세속주의, 그리고 사이비 기독교에 의해 더 심화되었다. 적대성의 궁극적 원인은 “이 세상의 왕”이다. 그는 심지어 몇몇 교회들에 침투하기까지 해왔는데 그 교회들의 자기들의 사명수행에 대한 냉담, 무관심, 이기심 그리고 실패는 사탄의 반대를 아주 잘 드러낼 뿐이다.

교회는 자주 흩어져 나뉜다. 붐비는 가운데 얻어맞으면서, 패배의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교회는 지옥의 문이 교회를 대항해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의 약속의 역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성서의 증거
그리스도는 사탄의 성격, 목적, 그리고 능력에 대해 증거했다(마4:1-11 ; 눅8:12 ; 11:14-26). 사도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에 대한 사탄의 끊임없는 대항을 인식했다(엡6:10-18 ; 고후4:4 ; 살전2:18).

사탄의 전략은 다양하고(고후2:11), 교묘하며(고후11:3,4), 집요하다(벧전5:8). 사탄은 거짓 그리스도들(마24:5), 거짓 설교자들(고후11:13-15),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벧후2:1-3), 그리고 거짓 교리(딤전4:1-3)를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믿고, 고난당하고, 십자가를 증거하고 지도록 부름받았다(요20:21 ; 빌1:29 ; 눅9:23-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교회를 불러내심과 완성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당한다(골1:24).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함께 싸워나간다(행4:24-31).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역사안에서의 그분의 승리와 그 교회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재확언한다. 우리는 성서의 조명아래서 사탄의 의도를 인식하여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근거해서 사탄에 대항하기를 힘쓸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우리는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우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박해에 대처해야 한다. 우리의 최고의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국가적 충성은 그분에게 속해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교회와 선교현장에 있는 모든 기독교 사역자들이 그 자신들 사이에 있는 긴장을 잘 분별하여 제거하기를 권장한다. 우리는 많은 나라에서 고난받는 기독교인들의 용기있는 증거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 우리는 기도로 그들을 좀 더 신실하게 지원할 것이다 ;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은총주실 것을 신뢰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복음 선포가 우리의 싸움의 무기라는 것을 믿기에 모든 신자들이 성령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해 나가기를 요청한다.

이 선언을 지지함에 있어서
우리 여기에 모인 대표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서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갖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그리고 그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가운데 함께 서약하노니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그리고 성령에 응답하는 새로운 헌신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됨 속에서 추구하노라
우리의 머리이신 분의 지도아래서
그분의 능력과 현존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교회의 총가동을 교회의 백성, 교회의 기도, 그리고 교회의 자원들과 함께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일리노이주 휘튼에서 1966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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