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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The Frankfut Declaration)

discipler 2005. 8. 30. 23:43
아래는 1970년에 채택된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이다. 이 선언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분은 아래의 파일을 클릭하라. 조동진 박사의 자세한 해설이 있어서 이 선언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 16)

최근에 매우 고무적인 선교 문서가 독일에서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위기를 다루면서 분명한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기독교인과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한다. 풀러신학교의 세계 선교 학부 학장인 Donald Mcgavran 박사는 그 선언의 배경을 설명하며 미국인 독자들에게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책임 있는 교회와 해외선교」를 Henry Lefever 와 함께 저작했으며 독일 Tübingen대학교 선교와 에큐메니칼 신학 연구소의 長인 Peter Beyerhaus 박사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 선교가 채택한 인본주의적 경향에 크게 혼란감을 느꼈다. 선교에 관한 Uppsala 선언이 단순한 수면 위의 파문이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 전환에 대한 신호임을 느끼고 그는 Humanisierung-Einzige Hoffnung Der Welt? (“인간화-세계의 유일한 희망인가?“)를 썼다. 그 글을 읽자마자, 나는 Beyerhaus박사에게 그 글의 영어 출판에 대해 편지를 썼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에게 그런 소중한 신앙을 가진 독일 신학자들을 모아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하여금 아주 건전하고 기독교적인 선교 개념을 갖도록 하는 선언을 발표하도록 강력히 권고했다. Beyerhaus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당신은 독일 교회와 선교 단체들 내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가 선교의 진정한 동기와 목표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탈로부터 야기된 깊은 걱정이 심화되고 있음을 듣게된다면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휘튼 선언을 발표케 했던 걱정과 비슷합니다. 저는 고백적 신앙의 신학자들의 협의회 “신학 회의"(The Theological Convention)에 의해 그런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부탁받았습니다. 이 문서는 1970년 3월 4일 프랑크푸르트의 우리 모임에서 충분히 토의되었고 마지막에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에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지금 여러 독일 간행물들에 출판되고 있으며 요직의 인사들에게 서명 요청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긍정적으로 답했습니다.

선교에 있어서의 명백한 성서적 동기와 실행에 대해 지지하는 당신의 열정적인 관심을 알고 있기에 저는 당신이 이 흥분되는 일에 즐거움을 느낄 것을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선교지도자들과 국제적 수준에서 심의할 근거를 사용될 영어 번역을 준비했습니다. 아마 미국의 신학자들이 우리 독일인들의 시도에 동참하는데 흥미를 가지리라 봅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처음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P. Beyerhaus 교수, Th.D., Tübingen
   W. Böld 교수, Th.D., Saarbrücken
   E. Ellwein 교수, Th.D., Erlanger
   H. Engelland 교수, Th.D., Kiel
   H. Frey 교수, Th.D., Bethel
   J. Heubach 교수, Th.D., Lauenburg
   A. Kimme 교수, Th.D., Leipzig
   W. Künneth 교수, Th.D., Ph.D, D.D., Erlangen
   O. Michel 교수,Th.D., Tübingen
   H. Mundle 교수,Th.D., Marburg
   H. Rohrbach 교수,Ph.D., Mainz
   G. Stählin 교수,Th.D., Mainz
   G. Vicedom 교수, Th.D., D.D., Neuendettelsau
   U. Wickert 교수 , Th.D., Tübingen
   J. W. Winterhager 교수, Th.D., Berlin

서명이 Beyerhaus 박사에게 쇄도하고 있다. 5월 11일에 그는 “이 선언이 전 독일어 사용 선교 세계를 들끓게 했습니다. 열성적인 지지와 극단적인 반대 사이에 반응은 다릅니다! 그러나 지지자들이 대다수인 것처럼 보입니다.”라는 소식을 나에게 다시 전해왔다.

공식 영어 번역판이 막 나에게 도착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북아메리카의 그리스도인들과 나누기 위해 서두른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비록 아주 독립적으로 발표되었지만, 휘튼 선언(「교회의 세계 선교」Harold Lindsell 편, Word사, 1996)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근본적인 위기”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선교적 동기와 목적을 명료화하기”위해 발표된 놀라운 선언이다. 그것은 성서에 충실한 소리를 낸다. 그것은 역사적 선교에 충실한 소리를 낸다. 그것은 세계복음화에 헌시하는 모든 사람에게 갈채를 보내는 동시에 복음의 적대자들을 당황케 할 것이다.

독일에서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WCC노선에 서 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교회들의 보수적 요소들은 제네바로 하여금 수평적 화해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적절한 선교 전략이라는 입장을 바구도록 호소한다. 제네바는 어느 정도 까지 잔존물을 보이도록 남길 것인가?

북아메리카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비슷하게 WCC에 동조한다. 실상, 그들은 또한 NCC와 같은 노선이므로, 어느 정도 유럽교회의 좌익 계열쪽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각 교회의 보수적 요소들(침묵하는 다수?)에게 서명을 받아 그것들을 갖고 교단본부에 몰려가 수직적 화해의 강조를 요구하도록 누군가를 선임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의 많은 교회들과 모임들과 수많은 사람이 WCC와 NCC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본질상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입장을 유지하는 단체들을 통해 20,0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다. 그들은 그 선언을 다음 둘 중의 한 방식으로 관계할 것이다.

1. WCC-NCC 동저 단체들 내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살피기.

2. 이러한 고백 신앙의 독일 신학자와 선교학자들의 성서적 입장을 지지하는 선언하기.

나는 복음적 해외 선교 연합회(The Evangel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와 間교단 해외 선교 연합회(The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의 모든 선교 단체와 독립 선교 단체들이 속히 많이 선언에 서명하고 “이것이 선교에 대한 우리의 흔들릴 수 없는 입장을 정의한다. 만약 이런 종류의 선교를 수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하라”라는 점을 알리는 것을 보고 싶다.

북아메리카 선교 단체들의 다양한 특성들 - 그들의 많은 교단적 협력 관계, 동맹관계, 신학적 견해의 차이, 수입원, 사역의 유형 -을 미뤄볼 때,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공통적 선언에 서명할 것을 권할 수 없다. 그러나 선언에 동의하는 사람은 기쁘게 자기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이제 행동을 할 때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대해 광범위한 신학자들과 선교지향적 그리스도인들의 서명이 당연하다. 독자들은 서명을 어디로 보내야 할 지를 알텐데 대개 선교 단체나 교단 본부로 보내야 한다. 각자가 자기 선교 단체나 교회에 자기가 이런 유형의 선교를 신뢰하며 지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게 하라.

우리는 우리 독일의 형제 그리스도인과 보조를 함께 맞추자. 지금부터 2개월 후면 우리도, Beyerhaus 교수처럼 “열성적인 지지와 극단적인 반대 사이에 반응은 다릅니다. 그러나 지지자들이 대다수인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독교]로부터
                         
선언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거룩한 특권이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온 세계로 확장되어야 할 사명이다.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그분의이름이 모든 민족 가운데서 영광을 받게될 것이고, 인류가 그 미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게될 것이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그의 재림에대한 기대 속에 확립될 것이다.

고백하건대, 비록 항상 같은 정도로 충실하거나 명확하게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해해 온 방식이다. 교회의 과제와 총체적인 선교적 의무에 대한 인식은 선교를 독일 개신교회와 WCC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낳았다. 그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 위원회와 분과는 1961년에 설립되었다. 이 분과의 목적은, 그 규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에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구원 받도록 끝까지 선포”하는 것을 담당하는데 있다. 이 정의가 신약 성경의 근본적인 사도들의 관심을 반영하며 개신교 선교운동의 선조들이 지녔던 선교에 대한 이해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나, 오늘날 조직적인 기독교 세계 선교가 근본적인 위기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외부적인 반대나 우리 교회와 선교 단체들의 영적 능력의 악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동기와 목적의 음험한 왜곡에 의한 기본적 과제의 전위가 더 위험하다.

그 내면 변질에 대해 깊이 염려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선언을 하도록 요청됨을 느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비신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구원 사역의 지속에 책임이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의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와 회중의 지도자들에게 선언한다. 그들에게 그 영적 사명의 전세계적인 전망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으로 특별히, 각자의 영적 전통에 따라 선교 활동의 진정한 목적을 지도하도록 부름받은 모든 선교 단체와 협조 기관들에게 선언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다음의 논제들을 그 성서적 기초에 근거하여 점검하고, 교회와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점점 명백해지고 있는 그 수행 상의 오류나 방식에 관하여 현재 상황에 관한, 이 진술이 정확한지 판단하도록 긴급히 그리고 절실하게 요청한다. 찬성할 경우에 우리는 당신이 서명을 함으로 함께 이 선언을 하며 당신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서 이 길잡이 원칙들을 주장하기 위한 회개와 결단을 함으로 우리에게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선교의 일곱가지 필수불가결한 근본 요소

1.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기독교 선교는 오로지 부활하신 주예수 그리스도의 위임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들의 초대 기독교의 증언에 의해 기록된 그분의구원 행위 속에서만 그 선포의 기초, 목적, 과제 그리고 내용을 발견한다. 선교는 복음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대에 대한 사회 정치적 분석과 비기독교 세계의 요청으로부터 선교의 본질과 과제를 결정하려는 작금의 경향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이 현대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에게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말해야 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오히려, 사도적 증언에 다르면, 복음은 규범적이고 단호하게 주어졌다. 만남의 상황이란 단지 복음 적용의 새로운 국면들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원초적 준거의 틀로서의 성경의 포기는 선교의 혼란과 선교 과제와 일반적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의무의 혼동을 초래한다.

2.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38:23)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시18:49, 롬 15:9)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선교의 제1차적이라면 최상의 목표는 전세계에 걸쳐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선교가 더 이상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인간의표명과 새로운 인간성의 모든 사회 영역에로의 확장만큼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인간화가 선교의 원초적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우리의 거듭남의 산물이거나 혹은 세계 역사 과정을 통해 영향력 있는 행위를 수행하는 능력을 지닌 기독교 선포의 간접적인 결과이다. 선교적 관심이 인간과 사회를 향해 일방적으로 전개되면 무신론을 초래한다.

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성경이 그 인격의 신비와 구원 사역을 통해 선언하신 대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선교의 기초요 내용이요 근거이다. 이 선교의 목표는 모든 분야의 모든 민족에게 그분의 구원의 선물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라는 근거안에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모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분을 믿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도전한다. 영원한 구원이 그분 안에서만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세계의 종교들과 역사적 변화와 혁명들 속에 익명으로 너무 분명히 존재함으로 복음의 직접적인 소식이 없이도 그 분을 만나며 그 분안에 있는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짓가르침(New Delhi WCC 제 3차 총회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 가운데 퍼지고 있는)에 반대한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그 인간성과 윤리적 모범으로 한정시키는 비성서적 제한을 거부한다. 그런 사고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종교와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을 위해 그리스도와 복음의 고유성이 포기된다.

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충분히 자격을 가진 사자들에 의해 설교와 성례와 예배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증언과 표현이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에 죽으심에 기인한다. 그 죽으심은 딱 한번에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구원을 개인이 소유하게 되는것은 먼저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와 신자를 사랑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세례를 통해서이다. 신앙이 회개와 세례를 통해 영새에 이르게 하는 것과 꼭같이 불신앙은 그 구원의 거부를 통해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행위에 대한 지식이나 그것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이미 중생을 했고, 이미 그와 화평을 이루고 있다는 보편적인 사고에 반대한다. 그러한 그릇된 생각을 통해 복음화의 사명은 그 충만하고 권위있는 능력과 긴급성을 모두 잃는다. 그것으로 인해서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그릇된 안심감을 갖도록 속임을 당한다.

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선교의 제 1차적인 가시적 과제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메시야적, 구원 받은 공동체를 불러 내는 것이다.
선교적 선포는 모든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해야 하며 그 교회는 그 사회적 주변 환경 속에 소금과 빛으로 정의되는 새로운 실재를 나타낸다,

성령은 복음과 성례전을 통해 회중의 구성원들에게 새생명과 성도 상호간,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원한 영적 교제를 가져다 주는데, 하나님은 실재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 증언을 통해 잃은 자들이 -특히 그 공도체 밖에 있는-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적 지체로 자리를 옮기게 하는 것이 회중의 과제이다. 교회는 이 새로운 류의 교제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만이 복음을 확신 있게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교제로서의 교회가 단지 세계의 일부라는 견해를 반대한다. 교회와세계의 차이는 단지 구원의 기능이나 구원에대한 지식의 차이가 아니다 : 오히려 추정되는 모든 사람의 미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제외하고 세상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부인한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에 따르면 교회와 사회가 미래에 순전히 사회적인, 온인류의 화해를 함께 공유한다는 이 세상만을 강조하는 구원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를 거부한다. 그것은 교회의 자기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6. 그러므로 생각하라 :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아직 지각 있는 신앙을 통해 그에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제시된다. 비기독교적인 종교나 세상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앙에의 참여를 통ㄹ해서만 이구성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신앙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용납되기 위해 자기 자신들을 이전의 굴레와 그릇된 희망들로부터 자유함을 입도록 해야 한다. 이스라엘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옴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기독교적 종교와 세상적인 견해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유사한 구원의 길들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을 거부한다.

우리는 세상 종교 신봉자들 가운데의 “기독교적 현존”과 그들과 주고 받는 대화가 회심을 목표로 하는 복음의 선포를 대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그런 대화는 단지 선교적 의사소통을 위한 좋은 접촉점을 마련할 뿐이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적 사고와 소망과 사회적 절차들-비록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배타적 관계성과 분리되었다고 하더라도-을 빌리면 세상 종교와 이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실제로는 그것들이 제종교 혼합주의를 낳아 반기독교적 방향을 제할 뿐이다.

7.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우리는 인식하고 선언한다 :
기독교 세계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인간들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결정적이고도 계속적인 구원 행위이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 새로운 나라와 민족들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든지 믿든지 결정하도록 초청받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 분에 관한 증거를 듣고 그 중거에 답하고 났을 대 적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되는 예수의 교회와 세계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친히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와 사탄의 마귀적 능력을 무력화 하시고 자신의 가시적이고 끝이 없는 메사야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신약 성서의 종말론적 기대가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으로 거짓임이 판명되어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반박한다.

우리는 동시에 복음의 영향이나 혹은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익명적 사역에 의해 모든 인류가 이미 보편적인 평화와 정의의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그분 아래서 거대한 세계 공동체로 하나가 될 것이라는 열광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를 반박한다.

우리는 메시야적 구원을 진보, 발전, 사회적 변화등과 동일시하는 것을 논박한다. 이런 것의 치명적인 결과는 사회적 긴장이 있는 곳에서 발전과 혁명적인 연루를 돕고자 하는 노력들이 기독교 선교의 현대적 형태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동일시는 우리 시대 유토피아 운동에 있어서 자기들의 궁극적 운명의 방향으로에서의 자기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교회들에 의한 정의와 평화에 대한 결정적인 옹호를 긍정하며 우리가 발전을 돕는 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뿐 아니라 자비와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청의 시의적절한 실현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선교의 중요한 부수물과 보증자를 본다. 우리는 또한 회심이 가져다 주는 인간화의 결과들을 다가오는 메시야적 평화의 전조들로 긍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타당한 복음에 대한 신앙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와는 달리 우리의 모든 사회적인 성취와 정치에 있어서의 부분적인 성공들은 다가오는 나라의 종말론적인 “아직도 오지 않았음”과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의 왕자”인 악마와 죄와 죽음의 아직 멸절되지 않았음에 의해 제한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 사역에 우선 순위를 결정하며 우리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라고 약속하신 그 분을 기대하는 가운데 애쓰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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