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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로잔대회, '케이프타운 선언문(2010)'에 대한 때 늦은 관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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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로잔대회, '케이프타운 선언문(2010)'에 대한 때 늦은 관심

discipler 2012. 8. 22. 23:54

지난 2010년에 있었던 제3차 로잔대회(198개국, 4,200명)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다. 로잔대회는 선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세계선교의 방향과 흐름에 대해 논의하는 장이다. 그 모임의 결과 채택된 것인 바로 케이프 타운(Cape Town) 선언문(2010)이다.

이 선언문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반기 선교훈련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선교훈련에 대한 철학과 방향에 대해 도움을 받고 싶었다. 선교의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르게 선교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차 로잔대회(1974년) :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한글읽기, 영문읽기)

제2차 로잔대회(1980년) :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o), (한글읽기, 영문읽기)

제3차 로잔대회(2010년) : 케이프타운 선언문(2010년), (한글읽기, 영문읽기, 영문PDF문서로 읽기)


제3차 케이프타운 선언문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town Committment, 2010):
믿음과 행동에의 요청에 대한 선언
 

목차 

서문(Foreword) 

전문(Preamble) 

제1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신앙서약 

1.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2.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3.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
4. 우리는 아들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5. 우리는 성령을 사랑한다. 
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7.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한다. 
8.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랑한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 

제2부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행동을 위한 요청 

서론 

1. 다원적이고 세계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담지하기
2. 분열되고 깨어진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평화 이루기
3. 타종교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4. 세계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기
5. 그리스도의 교회가 겸손과 온전함과 단순성으로 회귀하라는 부르심
6. 선교의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동반자 협력 

결론 


서문(Foreword) 

198개국, 4,200명의 복음주의자들이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3차 로잔대회(케이프타운 2010. 10. 16-25)에 참가했다. 그 외에 세계 곳곳에서 온라인을 통해 참여한 수 천명의 참가자들로 인해 대회 규모가 확대되었다. 제3차 로잔대회의 목적은-모든 국가, 사회, 사상 분야에서-전 세계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그의 가르침을 품으라는 참신한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 서약은 로잔언약과 마닐라 선언문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으로서 그 역사적 노선에 서 있다. 이 서약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부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적 확신들로 구성되며, 2부는 행동에의 요청을 기술한다. 

 1부가 형성된 과정은 이렇다. 전 세계(6대륙)에서 초청된 18명의 신학자들과 복음주의 지도자들이2009년 12월 미니아폴리스에 모여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서약에 관해 논의했다. 로잔 신학위원회 위원장인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끄는 이 소그룹은 케이프타운 대회에 제시하기 위한 최종 서약문 작성 준비를 시작했다. 

 2부가 형성된 과정은 이렇다. 로잔대회가 시작되기 전, 3년 이상 광범위한 연구과정이 진행되었다. 로잔운동의 국제총무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제기된,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 도전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 협의회를 준비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6개의 주요 이슈들이 부상했다. 이 이슈들은 대회 프로그램을 규정하고 행동에의 요청에 대한 골격을 구성했다. 이러한 청취과정은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로잔 문서위원회가 성실하게 모든 노력과 공헌을 기록하면서 대회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작업이었고 기념비적인 노력이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앞으로 10년 간 로잔운동의 로드맵으로 활용될 것이다. 우리가 희망하기에, 일하고 기도하라는 케이프타운 서약의 예언자적 부르심은 교회, 선교단체, 신학교, 일터의 그리스도인, 그리고 캠퍼스 학생 선교단체들로 하여금 그 서약을 수용하고 현장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찾기를 요청할 것이다. 그들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며, 형제자매들로부터 제기된 이러한 요청들은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하라는 요청이다. 

 다양한 교리적 진술들은 교회가 믿는 바를 확증한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을 실천과 연결하기 원한다. 우리의 모델은 사도바울의 모델로서, 그의 신학적 가르침은 실제적 교훈으로 구체화되었다. 예를 들어, 골로새에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심오하고도 경이로운 묘사는 그리스도 안에 근거한다는 의미에 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나타낸다.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만 하는 기본적 진리들과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성경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이차적인 이슈들을 구별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계범위 안에서의 넓이” 라는 로잔의 원리를 따랐는데, 제1부에는 이러한 한계범위들이 명백하게 규정된다. 

이상의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각 준비 단계부터 우리와 함께한 세계복음주의연맹과의 협력을 기쁘게 여긴다. 세계복음주의연맹 지도자들은 신앙고백과 행동지침 있어서 우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로잔운동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우리는 복음적 전통 위에서 말하고 기술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을 확증하고 다른 기독교 전통들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케이프타운 로잔대회의 참관인으로 참가한 역사적 전통에 서 있는 여러 교회 대표들을 환영했으며, 케이프타운 서약이 모든 교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겸손한 마음으로 케이프타운 서약을 제시한다. 

 케이프타운 서약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케이프타운 서약이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하나 된 목소리로 회자되고 논의되며 중요한 문서로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케이프타운 서약이 기독교 사역의 의제를 형성하고, 공공 분야에서 사려 깊은 지도자들을 굳건하게 하며 담대한 출발과 동반자 협력을 이끌어 내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비추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들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더글라스 버드설 로잔위원회 의장(S Douglas Birdsall Executive Chairman)
 린지 브라운 로잔 국제총무(Lindsay Brown International Director)


전문(Preamble) 

전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신자들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구원의 목적들에 기꺼이 우리의 헌신을 다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로잔운동의 비전과 목표들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가르침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증거하는 과제에 지속적으로 헌신한다. 제1차 로잔대회(1974)는 세계 복음화의 과제를 위해 소집되었다. 세계교회에 주어진 그 대회의 주요 선물들은, 무엇보다도 로잔언약이며,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성경적 복음과 기독교 선교의 통전적 성격에 대한 참신한 발견이었다.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대회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 간의 협력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을 포함하여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300개 이상의 전략적 동반자 협력 관계를 탄생시켰다. 

둘째, 우리는 로잔운동의 핵심 문서인 로잔언약(1974)마닐라선언(1989)에 지속적으로 헌신한다. 이 두 로잔 문서들은 성경적 복음의 핵심 진리들을 분명하게 나타내며 여전히 상관적이며 변화하는 상황의 선교적 실천 가운데 적용된다. 우리는 이 문서들 가운데 나타난 다짐들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영원한 복음의 진리를 표현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인식하면서, 그 헌신들을 권고하고 지킨다. 

변화하는 실재들(The realities change)

우리가 살아가고 생각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 거의 모든 방식은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좋건 나쁘건 간에 우리는 세계화와 디지털 혁명과 전 세계적으로 변하는 정치경제적인 힘의 균형에 충격을 느낀다. 전 세계적인 빈곤, 전쟁, 질병, 생태학적 위기, 기후변화와 같이 우리가 직면하는 변화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불안을 초래한다. 그러나 일련의 엄청난 변화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전 세계에 산재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장이다. 

제3차 로잔대회가 아프리카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입증이다. 적어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3/4이 현재 비서구에 살고 있다. 케이프타운 로잔대회의 구성은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 이래로 한 세기 동안 세계 기독교의 중심의 거대한 전환을 반영한다. 우리는 아프리카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기뻐하고 아프리카의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우리는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우리 세대가 직면하는 실재들에 응답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이전 세대들로부터 물려받은 복합적인 지혜와 실수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불변하는 실재들(Unchanged realities)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은 우리의 선교적 참여를 위해 성경적 원리를 제공한다. 

  •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이다.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근원적인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처해 있으며, 그리스도 없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참신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개념이 아니라, 참신한 진술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통치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셨던 불변하는 이야기이다. 그리스도 안에만 소망이 있다. 
  • 교회의 선교는 지속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지구상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된다.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통해 그의 구속된 인류와 함께 거하게 될 때, 그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선교는 즐거운 긴박감 가운데 지속되며, 우리 세대를 포함하여 모든 오는 세대들 가운데 참신하고 떨리는 기회들과 더불어 지속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의 열정(The passion of our love) 

이 선언문은 사랑의 언어로 구성된다. 사랑은 언약의 언어이다. 성경에 나오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잃어버린 인간과 오염된 피조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은혜의 표현이다. 그의 사랑과 은혜는 다시 우리의 사랑을 요청한다. 우리의 사랑은 그 자체로 우리의 언약의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과 열정적인 헌신을 보여준다. 로잔언약은 복음화를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열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잔언약을 재차 확증한다. 

  • 하나님의 창조가 죄와 악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모든 분야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쁜 소식으로서 온전한 복음에 대한 우리의 사랑
  • 이 땅의 모든 나라들과 전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이 세대에 하나님의 선교를 공유하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
  •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졌으나 그분의 마음에 품으신 세상,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의 유일하신 아들을 주신 온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

이 삼중적인 사랑에 붙잡혀 있는 우리는 온 교회가 되고 온전한 복음을 믿고 복종하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모든 열방을 제자 삼기 위해, 온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롭게 우리 자신들을 헌신한다. 


제1부 :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신앙 서약

For the Lord we love : The Cape Town Confession of faith) 

 1.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사랑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복음화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선성을 확증하고 사랑의 복종을 통해 나타난 믿음에 의한 은혜에 응답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기에 사랑한다.

A)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을 지탱하는 처음이자 가장 위대한 명령들로 구성된다. 사랑은 율법을 성취하며 성령의 첫 열매이다. 사랑은 우리가 거듭났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확증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증거이다.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종할 때만 이 명령이 그들의 사명이 가시적이고 믿을만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에 그 자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사랑은 바울이 믿음과 소망과 함께 새로운 신자들 가운데 관찰하고 명령했던 첫 번째 요소이다. 그러나 사랑은 가장 위대한데, 그 이유는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B) 이러한 사랑은 약하거나 감상적이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언약적으로 신실하며 헌신적이며 자기를 내어 주며, 희생적이고 강하며 거룩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그의 전 존재와 그의 행위, 그리고 그의 긍휼뿐 아니라 그의 공의에 스며들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전 창조 세계로 확장된다. 우리는 이 모든 동일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방식들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이다. 

C) 따라서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의 신념과 헌신을 세우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힘든 성경적 도전을 떠맡고 있다: 

 1) 우리의 마음과 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서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2) (외국인들과 적을 포함하여)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 
 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 사랑하라. 
 4)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라.

D)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내 가운데 강건하나 겸손함 가운데 온유하고 악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하나 고통에 대해 긍휼 가운데 부드럽고 고통 가운데 용기가 있으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굳건하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 모델로 나타났으며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포괄적인 성경적 사랑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보증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예수님의 기도와 명령에 대한 응답 가운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될 것을 열망한다.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 자주 그렇지 못함을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나님에 대한 사랑,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가운데 걷는 것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려는 모든 노력을 하기 위해 새롭게 우리 자신을 재차 헌신한다. 

 2.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주권적인 뜻과 구원의 목적에 따라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유일하며 영원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성경 가운데 계시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 홀로 창조자이며 지배자이며 심판자이고 세상의 구세주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 세계 안에 우리의 위치에 즐겁게 감사하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복종하고 그의 공의를 확신하며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을 영원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 

A)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신들, 즉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들을 좇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변질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맘몬을 섬기며 탐욕과 권세와 성공이라는 우상에 현혹되어 혼합주의에 빠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 비판하지 않고 지배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념들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는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회개에의 요청을 듣고 다른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 전적으로 사랑하고 예배하도록 돌아와야 한다. 

B)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 그를 사랑한다. 우리의 선교의 최상의 동기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우리의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온 피조 세계를 통해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를 이끌어 가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만일 하나님이 예수님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술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이 때때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열심’(jealous)을 내야만 한다-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며 그것이 도외시될 때 상처를 받으며 그것이 우상숭배로 나타날 때 분개하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경외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항상 열망하며 단호한 태도를 나타내게 된다. 모든 선교적 동기들 가운데 최상의 것은 지상대위임령(중요하기는 하지만)에 대한 복종도 아니고 소외되고 멸망하는 죄인들에 대한 사랑(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숙고해 보면 그러한 자극은 강력하다)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열망, 불타는 열정적인 열망이다. 이러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최상의 목표 앞에 모든 무가치한 동기들은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인 것이 틀림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공격적인 무신론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세계 종교들로 대체되고 그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중문화 가운데서 왜곡되고 잘못 진술되고 있다. 그리고 성경적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기독교 명목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위선에 의해 퇴색되고 있다.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담대하지만 겸손한 증거를 요청하고 계신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대해 강건하지만 은혜로운 증거,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며 확신케 하시는 사역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를 위해 우리 자신을 헌신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우선적 관심을 함께 나누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과 말씀이 모든 것들 위에 높임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를 통하여서만-우리는 아버지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을 통해 증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따르며 “우리 아버지”라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를 따라 기도한다. 예수님께 순종하므로 입증되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간의 사랑의 교통 가운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처럼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심오한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A) 우리는 그의 백성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버지, 즉 그들의 존재의 근거가 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훈련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시고 그들의 사랑을 열망하시며 긍휼이 넘치는 용서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다. 

B)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은 어떻게 측량할 수 있는가?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신 아들의 사랑으로 반영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조화가 나타났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예수님 자신에 의해 분명히 확증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광이 영원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반복한 바울의 문안 인사에 반향 된다. 

C) 우리는 우리가 닮아가려는 성품을 보여 주시며 우리가 신뢰하려는 돌보심을 베푸시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위한 모델이나 초점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반복하여 제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피스메이커들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선행 행위들을 하므로 우리 아버지가 찬양을 받으신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을 통해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시각으로 우리의 베풂과 기도와 금식을 실천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근심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행위로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진리를 무시하고 그분과 우리의 관계의 풍성함을 깨뜨린 것을 고백한다. 우리는 아들 예수를 통해 아버지에게 오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응답하며 아버지의 훈계에 복종하며 살아가고 우리의 모든 행위와 태도에서 아버지의 품성을 반영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섭리를 신뢰하기 위해 새롭게 우리 자신의 헌신을 다짐한다. 

4. 우리는 아들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심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 분만 홀로 구세주이며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끊임없이 확증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동일하게 주권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심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이시고 열방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시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이들의 구세주이시다. 그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적인 동등성과 본성 가운데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다. 하나님께서 계약적 신앙과 복종과 종의 증거 가운데 자신을 사랑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복종하며 전파하므로 그 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한다. 

A)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한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열방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고 보냄 받은 메시아라는 복음서의 증거를 믿는다. 

 1)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셔서 온전한 하나님과 온전한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2) 예수께서는 그의 생애 동안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실함과 순종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으며,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 주셨다. 
 3) 예수께서는 사역과 기적을 통해 마귀와 악의 권세를 누르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선포하셨고 보여 주셨다. 
 4)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형벌과 수치를 당하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죽음과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피조물의 화해와 구속을 성취하셨다. 
 5) 예수께서는 그의 육체적인 부활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입증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셨으며 구속된 인류의 모본이 되셨으며 만물을 회복하셨다. 
 6) 예수께서는 그의 승천 이래 주님으로서 모든 역사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 
 7)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고 사탄과 악과 죽음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B) 우리는 그리스도께 복종한다. 예수께서는 우리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종으로서 복종하며 그를 따르라고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신다.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여, 주여 부르느냐. 내가 말한 것들을 행하지 않느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셨던 것처럼 살아가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계명을 무시하면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화려하고 기적적인 사역으로 그의 이름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며 그 분에 의해 거부될 것임을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경고를 유의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러한 무시무시한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C)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하고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하여 세상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로서 나사렛 예수의 발아래 무릎을 꿇으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도마의 고백을 하게 된다. 비록 우리가 그 분을 볼 수는 없으나 그 분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을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들에 복종하며 살아간다면 그러한 증거를 담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가르침을 담지하기 위해 새롭게 우리 자신을 헌신한다. 

 5.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연합 가운데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에 대한 증거를 담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령을 사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적 교회에 대한 생명과 능력을 불어넣는 선교적 아버지와 아들의 선교적 영이다. 우리는 성령을 사랑하며 그의 임재를 위해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없이 우리 자신의 증거는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는 사역이 없는 우리의 설교는 헛되다. 성령의 능력 없이 우리의 선교는 단지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 없이 우리의 시시한 삶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수 없다. 

A)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창조와 해방과 정의의 사역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섬김을 위해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능력을 부여하는 가운데 활발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에게 인격과 사역을 부여하실 왕과 종의 오심을 고대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과 참신한 복종을 요구하는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나타날 도래할 시대를 고대했다. 

B) 오순절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은 신자들의 삶에 그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그 첫 열매는 항상 사랑이다. 성령은 그의 은사들과 선교를 위한 능력, 그리고 다양한 섬김의 사역들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신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고 제시하며 진리를 분별하고 올바로 기도하고 어두움의 세력들을 제압할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운데 박해를 받거나 시련을 당했던 제자들을 강하게 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C) 따라서 선교에 참여하는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이는 초점을 상실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것은 선교의 모든 차원들인 복음 전도 진리에 증거를 담지하는 것, 제자 삼기, 평화를 이루는 것, 사회참여, 윤리적 변혁, 창조 세계에 대한 돌봄, 악한 세력들을 제압하는 것,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역, 박해 가운데 고통을 참아 내는 것에 있어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아야만 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의 삶과 사도들의 가르침 가운데 이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 오늘날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확고하게 행동하는 교회의 열매와 성장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과 능력 없이는 참되고 온전한 복음도 없고 진정한 성경적 선교도 없다. 우리는 전 세계에 산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성경적 진리에 대한 보다 놀라운 각성이 일고, 그것이 실재적으로 경험되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이름을 가장한 많은 기만들을 깨닫는다. 그것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듯이) 성령의 표지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들의 표지들을 담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다. 보다 심오한 분별력과 기만에 대한 명백한 경고들, 자기 자신들을 경건치 못한 재물 추구를 위해 영적 능력을 오용하는 부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자들을 드러내기 위한 절실한 필요가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참된 복음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거짓된 복음을 파악하고 거부하는 신자들을 구비시킬 겸손한 기도로 무장한 견고한 성경적 설교와 가르침이 절실히 요청된다. 

 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우리는 “내가 주의 말씀을 정금보다 사랑하나이다. … 얼마나 내가 주의 율법을 사모하는지요”라고 고백하는 시편기자의 기쁨을 반향하는 신구약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고 인간 저자들을 통해 선포되고 쓰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온전한 성경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행위를 지배하는 최상의 유일한 권위로서 성경을 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말씀의 능력을 입증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 이상을 능가하는 어떤 다른 계시가 아니라 종국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조명하므로 모든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참신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A) 성경이 계시하는 인격. 우리는 신부가 편지 자체가 아니라 그 편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담고 있는 남편의 편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성경을 사랑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 인격, 목적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 증거이다.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놀라운 기쁨 가운데 그의 영을 통해 그를 만난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다. 

B)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 성경은 창조, 타락, 역사 안에서의 구속, 새 창조에 대한 우주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분명한 성경적 세계관을 제공하며 우리의 신학을 형성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복음의 핵심을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최고의 구원 사건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우리의 선교를 이끌며 마지막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세대를 걸쳐 전해지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억과 소망을 형성하며 그들의 복음 증거의 내용을 지배한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성경을 알려야만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메시지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반적으로 구술적이거나 문맹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문화와 언어 가운데 성경을 번역하고 반포하며 가르치는 지속적 과제에 우리 자신의 헌신을 재차 다짐한다. 

C) 성경이 교훈하는 진리. 온전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온전한 진리를 교훈한다. 우리는 성경이 입증하는 모든 것들이 참되며 확실한 것으로 성경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거짓될 수 없으며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의 길을 계시하기에 분명하고 충분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차원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기초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만하고 거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많은 문화들이 어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거나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지배적인 상대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사랑한다면 성경의 진리 주장들에 대한 변증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모든 문화들 가운데 성경의 권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노력의 일환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위해 힘쓰는데 우리 자신을 헌신할 것을 재차 다짐한다. 

D) 성경이 요구하는 삶. “말씀이 네 입이 있고 네 마음에 있으므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과 야고보는 단지 말씀을 듣는 자들이 아니라 행하는 자들이 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성경은 신자들과 신자들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삶의 질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시편 기자들, 예언자들과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자들, 예수님과 사도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찬양과 신실한 삶 안에 결합된)정의, 긍휼, 겸손, 청렴성, 정직, 진실함, 성적 순결함, 관용, 친절, 자기부정, 환대, 피스메이킹, 보복하지 않음, 선을 행함, 용서, 기쁨, 자족과 사랑을 포함하는 이러한 성경적 생활양식을 배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삶-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값진 실천적 복종의 삶-을 사랑함이 없이 쉽게 성경을 사랑한다고 주장한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복음만큼 변혁된 삶을 감동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없으며, 개인적 모순에 대해서 그렇게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값진 것이며 거룩한 삶을 통해 복음의 아름다움을 고양하므로 그 복음의 ‘광휘’를 나타내는 태도 가운데 행동할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는 복음을 믿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헌신을 재차 다짐한다. 성경적 삶이 없이 성경적 선교는 있을 수 없다. 

 7.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창조 전반에 걸쳐 그의 섭리와 공의 가운데 즐거워하며, 모든 피조물과 모든 열방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 이 땅에 가득 찰 그날을 고대하며 그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을 공유한다. 

A)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성경 어디에서도 명령하지 않은 것으로서) 자연에 대한 단순한 감상적인 애정이 아니며,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것으로서) 범신론적 예배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돌보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논리적 결과이다. 이 땅은 우리가 사랑하고 복종하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우리는 가장 단순하게 이 땅을 돌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그 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탱되고 구속된다. 우리는 창조와 구속과 상속의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남용하는 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세속적인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이 땅을 돌보고 그 풍성한 자원들을 책임적으로 사용한다. 만일 예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이 땅과 연관된 우리의 행동 방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분리할 수 없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이 땅을 포함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안에서 복음의 이슈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들을 파괴하고 허비하며 오염시키는데 일조하며,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 숭배에 공조한다는 것에 대한 회개이다. 그보다도 우리는 긴박하고도 예언자적인 환경적 책임을 완수하는 데 우리 자신의 헌신을 다짐한다. 우리는 환경적 옹호를 특별한 선교적 소명으로 깨달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풍성함으로부터 인간의 필요들을 제공하고자 하는 위임을 경건하게 성취하는 데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한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 자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통전적 선교는 복음이 개인들과 사회와 피조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분별하고 선포하며 살아 내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사회와 피조 세계 모두는 죄로 인해 깨어지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구속적 사랑과 하나님의 선교에 포함된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포괄적 선교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B) 우리는 세상의 나라들과 문화들을 사랑한다. “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땅 곳곳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 나라들을 만드셨다.” 종족적 다양성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이 타락한 분열과 적대감에서 해방될 때 새 창조 가운데 보전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이 땅의 모든 열방들을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반영하며 그를 위해 모든 족속과 언어와 나라와 백성들을 부르라는 하나님의 선교를 반영한다. 우리는 모든 문화들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축복하려고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선교는 토착 문화와 언어를 보호하고 보전하는 도구였다. 그러나 경건한 사랑은 모든 문화들이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의 긍정적 증거를 보여줄 뿐 아니라 사탄의 부정적인 지문들과 죄의 표지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비판적 분별을 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문화들을 안에서부터 구속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광채의 충만함을 보여 주는 모든 문화들 안에 구체화되고 각인된 복음을 보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 안으로 허입된 구속되고 모든 죄가 씻기므로 새 창조를 풍요롭게 하는 모든 문화들의 풍요로움과 영광과 광채를 고대한다. 

모든 백성들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인종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악을 거부하고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가치의 근거 위에서 존엄과 존경으로 모든 종족과 문화를 대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문화 가운데 복음을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떤 나라도 지상대위임령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복음 전도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들을 사용하기 위해 로잔운동의 출발부터 고취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한다. 

C) 우리는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을 사랑한다. 성경은 주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억압받는 자들을 위하고 계시고 국외자들을 사랑하시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신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혜로운 행위에 헌신한 사람들을 통해 그러한 일들을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 사회의 정치적이거나 법적 리더십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그러한 책임을 부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율법과 예언자들, 시편과 지혜서들, 예수님과 바울, 야고보와 요한에 의해- 실천적인 사랑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반영하는 명령을 받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자비와 긍휼의 행위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것들을 드러내고 반대하는 행위를 통해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악이 존재하는 곳마다 악과 불의를 고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열정을 공유하는 데 실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며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부끄러움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을 대신하는 연대성과 옹호를 포함하여 정의를 촉진하는 데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받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끊임없는 기도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영적 전쟁의 차원으로서 악에 대항하는 이러한 영적 전투를 인식한다. 

D) 우리는 우리의 몸과 같이 우리 이웃들을 사랑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두 번째 위대한 명령으로서 이 계명에 복종하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셨지만, (같은 장에서) “너 자신처럼 국외자를 사랑하라”는 요구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로 심화시키셨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가운데 복음의 심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타종교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며 우리를 미워하고 비방하며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예수께서는 예수께로 사람들을 이끌고 악의 사슬을 부수기 위해 진리로 거짓을 대항하며 친절과 자비와 용서의 행위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항하고 자기희생으로 그의 제자들을 반대하는 폭력과 살인에 대항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폭력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보복의 유혹을 비난한다. 이러한 불복종은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의 본과 가르침에 모순된다. 동시에 우리의 고통당하는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의무는, 잘못된 자들에게 벌을 가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종들로서 역할을 하는 법적인 권위와 국가적 권위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적절한 호소를 하므로 그들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E)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세상.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인간의 세상과 사탄의 반역의 세상이 되어 갔다. 우리는 죄악된 욕망과 탐욕과 인간적 오만을 드러내는 그러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확하게 그러한 세상성의 표지들이 너무 자주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손상시키고 복음의 증거를 부정하는 것을 슬픔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타락된 세상과 세상의 덧없는 열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온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새롭게 우리 자신의 헌신을 다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모든 문화들의 구속과 갱신을 거룩하게 열망하며 땅 끝까지 이르도록 모든 열방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파괴와 빈곤과 증오를 불식시키는 가운데 세상을 사랑한다. 

 8.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복음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성경적 기쁜 소식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다. 우리는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과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땅 끝까지 이르러 은혜의 복음을 알리려는 우리의 동기에 의해 연합된다.

A) 우리는 추악한 소식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사랑한다. 복음은 인간의 죄와 실패와 필요에 대한 비참한 결과들을 제기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이러한 죄악된 상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서로 소외를 시켰으며 창조 질서로부터 소외되었다. 죄는 하나님의 유죄판결을 받을 만하다. 회개를 거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파괴의 형벌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격리될 것이다. 죄의 결과와 악의 권세는 인간성의 모든 차원들(영적, 신체적, 지적, 관계적)을 부패시켰다. 그것들은 전 문화와 전 역사를 통해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삶에 스며들었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셀 수 없는 비참함을 야기했으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해를 가했다. 이러한 황폐한 상태에 반하여 성경적 복음은 실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B) 우리는 복음이 말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인 기쁜 소식으로서 선포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인 약속된 메시아이며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의 왕국을 확립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열방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세상의 구원을 위해 행동을 취하셨다. 바울은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묻히셨으며, 성경에 따라 제3일 만에 부활하시고 베드로와 12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며 복음을 진술한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의 아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으시려 하나님 자신이 못 박히신 것을 선포한다. 동일한 위대한 구원의 행동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죽음과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하셨으며 우리는 사탄의 권세와 두려움에서 해방하셨고 그들의 궁극적 파멸을 확증하셨다. 그 분은 모든 장벽들과 반목들을 넘어서 하나님과 믿는 자들과의 화해와 그들 서로 간의 화해를 이루셨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화해의 목적을 이루셨고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가운데 새 창조의 첫 열매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과 화해시키셨다.” 우리가 얼마나 복음 이야기를 사랑하는지! 

C) 우리는 복음이 확증하는 것을 사랑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를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고 더 이상 비난(condemnation)에 직면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나누므로 산 소망 가운데 거듭났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들로 양자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시민들,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처소에 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므로 우리는 온전한 구원과 영생의 확증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사랑하는가! 

D) 우리는 복음이 초래하는 변혁을 사랑한다. 복음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삶을 변혁하는 능력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믿음만이 축복과 복음의 확증이 부여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혼자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복종 가운데 반드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사랑을 통하여 표현되는 믿음이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룬 은혜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안에서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은혜-의 역사로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변혁을 보았다. 바울에게 “복음에 순종하는 것”은 은혜를 신뢰하는 것이고 은혜에 의해 교훈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의 선교적 목표는 모든 열방들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한 언약적 언어는 아브라함을 상기시킨다. 아브라함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의 믿음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순종은 복음이 요청하는 첫 번째 순종의 행위들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복음적 믿음이 할 수 있는 생활방식이다. 따라서 순종은 구원하는 믿음의 생생한 증거이며 생생한 열매이다. 또한 순종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시험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얼마나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사랑하는가! 

 9.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 창조의 시민들로서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거룩하게 하신 모든 세대들과 온 열방들에서 온 백성들이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리고 우리의 거칠고 반역적인 전 역사를 통하여 사랑하신 백성들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자들이 되며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희망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계명이다. 그러한 사랑은 복음에 대한 순종의 첫 번째 증거이며 세계 선교의 유력한 동력이다. 

A) 사랑은 연합을 요청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그의 계명은 그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의 기도와 연결된다. 이 계명과 기도는 선교적이다.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당신(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알 것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확신하는 표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고질적인 분열의 장벽들-인종과 피부색, 사회계층, 경제적 특권이나 정치적 노선의 장벽들을 넘어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 가운데 이와 똑 같은 분열들을 드러내고 확대할 때 나타나는 것처럼 몇 가지 분열의 양상들이 우리의 증거를 파괴한다. 우리는 우리를 나누는 모든 것들을 버리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러한 장벽들 가운데 우리는 전 세계적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수치스러운 극단적인 물질적 불평등으로 심히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모든 이들을 위한 상호관계와 충족함이 있어야만 된다는 바울의 교훈과 열망을 부정한다. 우리는 때때로 선교를 위한 우리의 열망에 해독을 끼치는 경쟁을 규탄한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교회들 안에 선교를 위한 가능한 자원들의 불균형 양상을 개탄한다. 우리는 모든 대륙을 가로질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심오한 상호간의 사랑과 겸손한 동반자 협력에 근거한 새로운 글로벌 균형을 긴박하게 추구한다. 또한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행위로 나타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이것을 추구한다. 

B) 사랑은 정직을 요청한다. 사랑은 은혜와 더불어 진리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언약의 주님에 대항하여 실패하고 우상숭배하며 반역한 사실에 대하여 그들보다 더욱 솔직하게 직면했던 사람들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를 요청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도록 회복될 수 있었다. 동일한 예언자적 사랑의 음성이 동일한 이유로 오늘날 선포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사랑의 정직성은 우리가 회개하는 가운데 겸손과 정직함과 희생적 단순성이라는 경건한 방식들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탄원한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지도자들을 유혹하는 오만과 거짓된 성공과 소비주의적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들을 거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세상-필사적으로 예수께 인도해야 할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손상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덮는 추악함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므로 인해 슬픔으로 고통을 겪는다. 

C) 사랑은 연대성을 요청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특히 믿음과 복음증거로 인해 박해를 박고 감옥에 갇히는 자들을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만일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들이 고통을 당한다. 사도 요한과 같이 우리 모두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전을 더욱 챙기면서 우리의 박해받는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연대성을 항상 보여주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정보와 기도, 그리고 옹호와 다른 후원 수단들을 통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신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헌신을 다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닌 나눔을 보며, 고통받는 교회가 교훈을 줄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배우려는 열망을 본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부유함과 자기만족감 가운데 편안하게 느끼는 교회는 예수께서 보시기에 자신의 헐벗음을 가장 깨닫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는 낯선 손님처럼 느끼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예수께서는 그의 모든 제자들이 열방들 가운데 한 가족이 되는, 즉 모든 죄악 된 장벽들이 그의 화해케 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깨어지는 화해를 이루는 친교로 부르신다. 이러한 교회는 성령의 교통 가운데 있는 은혜와 순종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러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속성들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특성들이 반영되고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왕국의 가장 명백한 현재적 표현으로서 교회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구세주를 위해 살아가는 화해를 이룬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 

우리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다. 그 이유는, 세계 선교가 하나님과 성경, 교회와 인간 역사와 종국적인 미래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온전한 성경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화해를 이루시는 그리스도 아래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교를 계시한다. 자신의 선교를 성취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으로 파괴된 창조 세계를 더 이상 죄나 저주가 없는 새 창조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열방들을 축복하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흩어진 분열된 열방들을, 모든 종족과 열방과 방언과 언어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구세주를 찬양하려고 모이게 될 새로운 인류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공의와 평화의 영원한 통치를 하시려 다시 오실 때, 죽음과 부패와 폭력의 통치를 무너뜨리실 것이다. 그런 다음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세상의 왕국은 우리 주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이며 그는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A) 하나님의 선교에의 참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교를 나누시려고 그의 백성들을 부르신다. 모든 열방들로부터 온 교회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부름을 받았고 열방들에 대한 축복과 빛이 될 위임을 받았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는 죄와 고통의 세상 가운데 성결함과 긍휼과 정의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형성되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증거를 담지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 교회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역사 안에서 변혁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창조 전반을 다루며, 그 중심으로서 십자가의 구속적인 승리에 근거한다. 이것은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우리가 공유하는 선교를 함께 하는 백성들이다. 

B) 우리의 선교의 통전성. 우리의 모든 선교의 자원은 성경에 계시된 것처럼 온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이다. 우리의 복음 전도 과업은 모든 열방이 그 기쁜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교의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즉 죄와 고통과 불의와 창조질서의 파괴로 가득 찬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러한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우리를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선교는 복음 전도와 세상에의 참여가 통합된 형태를 반영한다. 하나님의 복음의 온전한 성경적 계시는 복음 전도와 세상에의 참여를 명령하고 이끌어 나간다. 

“복음 전도 자체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므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시각과 함께 구세주이며 주님이신 역사적이고 성경적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이다. … 복음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그의 교회에의 허입, 그리고 세상에서의 책임적인 봉사를 포함한다. …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확증한다. 이 둘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우리의 교리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필수적인 표현들이다. …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전체성 가운데 우리를 변혁시켜야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통전적 선교(integral mission)는 복음의 선포와 복음의 증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나란히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것처럼, 통전적 선교 안에서 우리의 선포는 사회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변혁하는 은혜에 대한 증거를 담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참여는 복음 전도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무시한다면 세상을 섬기라고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가져갈 아무 것도 없게 된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회개, 믿음, 세례, 그리고 복종적인 제자직으로 부르시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열방에게 알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긍휼이 넘치는 돌봄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힘쓰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의 가치와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대한 응답과 그 분에 대한 우리의 넘치는 사랑의 표출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함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완전히 순종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재차 헌신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과의 이 언약을 갱신한다. 


제2부 :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행동을 위한 요청

For the world we serve : The cape Town Call to Action

서론

하나님과 맺은 우리의 언약은 사랑과 순종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보시기를 기뻐하신다.(주56)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자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주5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의 신자들로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힘썼다. 우리는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백성들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들었다. 케이프타운 대회에서 논의된 6개의 주제들은 전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과 미래의 우선순위들을 분별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러한 헌신의 서약들이 교회가 고려해야만 하는 유일한 것이거나, 어느 상황에서나 동일한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I. 다원적이고 세계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담지하기 

1. 그리스도의 진리와 인격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진리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진리는: (1) 명제적일 뿐 아니라 인격적이며; (2) 상황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이고; (3) 현재적일 뿐 아니라 궁극적이다. 

A)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진리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

 1) 우리는 진리로 살아가야 한다. 진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를 닮는 것으로서, 그를 통하여 복음의 영광이 어두운 마음에 비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실함과 사랑 가운데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가운데서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선포는 여전히 우리의 선교의 중심이다. 그것은 진리로 살아가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행위와 말씀은 반드시 함께가야만 한다. 

B)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과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의 모든 우주적 시야와 보편적 진리 가운데 성경적 복음의 온전함을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단순히 개인적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나 다른 신들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보다 더 나은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온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복음을 제시해야만 한다. 


2. 진리와 다원주의의 도전

문화 다원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는 우리의 현실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세기 동안 문화 종교 다원주의와 더불어 살아왔다. 각 종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유일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타종교들의 경쟁적 진리 주장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적 다원주의는 다르다. 그 이념은 절대적이거나 보편적 진리란 없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진리주장들에 대해 관용하는 한편, 종교들을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 이상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논리적으로 자기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일한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절대적 주장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궁극적 가치로서 “관용”을 주장하지만, 세속주의나 공격적인 무신론이 공적 분야를 지배하는 국가들에서는 억압적인 형태들을 옹호할 수 있다. 

A) 우리는 확고한 변증이라는 어려운 작업에 더욱더 헌신하는 모습을 보기를 열망한다. 이것은 두 가지 수준으로 나타난다. 

 1) 우리는 공적 분야에서 성경적 진리를 수호하고 설득하는데 있어서 최상의 지식인과 공적 수준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구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진리가 일상적인 공적 대화와 예언자적 상관성과 연관되도록 모든 신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도구들을 구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문화적 상황에 참여하도록 촉구한다. 


3. 진리와 일터

성경은 창조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의 일부로서 인간의 노동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가 여러 소명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듯이 사역 가운데 우리의 노동하는 삶 전반을 제시한다. 대조적으로 “성속의 분리”라는 허위는 교회의 사고와 행동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분리는 종교적 활동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세상에서의 활동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가치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소위 세속적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은모든 삶의 영역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바울은 세속적 일터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주58)고 훈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는 일터가 제공하는 엄청난 복음전도와 변혁을 초래할 기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회들만이 그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신자들을 구비시키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모든 삶을 드리지 못했듯이, 일 자체를 성경적이며 본질적으로 여기지 못했다. 

A) 우리는 이러한 성속의 분리를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동원하는 주요 장애물로 지적하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비성경적인 가정들을 거부하고 그 해로운 영향들에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지역적이고 타문화적) 사역과 선교를 주로 그리스도의 몸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유급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에 도전한다.

B) 우리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부르신 모든 일터로서 일상사역과 선교를 수용하고 확증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성도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봉사[사역]를 위해 그들을 구비하며 그러한 사역 가운데-공동체와 일터에서-사람들을 도울 것을 요청한다. 

C) 우리는 온전한 삶의 제자직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훈련하는 집중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과 일터에서 선교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며, 생각하며, 일하며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기술과 무역과 비즈니스 전문분야를 통해 대개 전통적인 교회개척자들과 복음전도자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이러한 “텐트메이커들”과 비즈니스 종사자들의 일터사역은 지역 교회들의 사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D)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일터 사역의 전략적 충격을 이해하고 교인들을 선교사로 동원하고 구비하여 그들의 지역 공동체의 일터와 전통적인 복음증거를 거부하는 국가들에 파송할 것을 촉구한다. 

E) 우리는 선교 지도자들이 “텐트메이커들”을 글로벌 선교전략으로 통합할 것을 촉구한다. 


4. 진리와 글로벌 미디어

우리는 미디어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진리를 드러내는 자들로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고자 한다. 

A) 미디어에 대한 인식: 사람들이 수용하는 메시지와 그들의 세계관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인식증대를 돕는다. 미디어는 중립적이며 때로는 복음에 우호적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포르노, 폭력, 탐욕에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러한 이슈들에 개방적으로 접근하고 신자들이 그러한 압력과 유혹을 거부하도록 가르치며 에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을 권장한다. 

B) 미디어의 실재: 일반적인 뉴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분야에서 확실하고도 신뢰할만한 기독교적 역할 모델들과 커뮤니케이터들을 발굴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영향력을 미치는 훌륭한 수단들로서 해당 분야의 경력을 가진 자들을 격려한다. 

C) 미디어 사역: 통전적인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통적”인 미디어와 신구(old and new) 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위한 창의적이고 통합적인 용도를 개발한다. 


5. 선교에 있어서 진리와 예술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우리는 창의성이라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예술은 통합적 인간 행위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반영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예술은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드라마, 춤, 이야기, 음악, 그리고 시각 이미지는 우리의 분열이라는 실재와 복음의 핵심으로서 만물이 새롭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실재를 드러내는 표현들이 될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 예술은 미개척 분야이다. 우리는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분야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A) 우리는 교회가 모든 문화 가운데 선교를 위한 상황으로서 예술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기를 열망한다. 


 1) 예술이 제자직에 대한 우리의 소명의 가치 있고 타당한 구성요소로서 신앙공동체의 삶과 연관되어야 한다.
 2) 예술적 은사를 가진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후원하므로 그들의 사역이 번창하도록 만든다. 
 3) 예술이 우리의 이웃과 타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다.
 4)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고 토착 예술적 표현들을 경축한다. 

 

6. 진리와 부상하는 테크놀로지 

21세기는 모든 부상하는 테크놀로지의 진보를 이룬(바이오, 인포/디지털, 가상실재, 인공지능과 로봇기술) “바이오-테크놀로지 세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교회와 선교, 특히 인간존재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 진리와의 연관성에서 깊은 함의를 내포한다.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의 인간성을 조종하고 왜곡하며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고 구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확증하기 위하여 공공정책 분야에서 진정한 기독교적 응답과 실제적 행동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A)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1) 과학, 테크놀로지, 헬스케어, 그리고 공공정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며 질문을 제기하며, (2) 그리스도인들이 해당 분야에 참여할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신학적으로 신중하게 제시해야 한다.

B) 신학교들은 커리큘럼에 이러한 분야들을 포함시키므로 미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해 정확한 기독교적 비판능력을 함양하도록 해야 한다. 

C) 정부, 비즈니스, 학계, 기술 분야에서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분야에 참여하기 위해 국내나 지역의 “싱크탱크”나 동반자협력을 구축하고 성경적이고 상관적인 목소리를 내므로 공공정책 형성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D) 모든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창조된 인간성의 물질적, 감정적, 관계적, 그리고 영적 양상들을 통합하는 실제적이고 통전적인 돌봄을 통해 인간의 삶의 독특한 존엄성과 신성함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7. 진리와 공적영역 

정부, 비즈니스, 학계가 연계된 영역들은 각 국가의 가치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교회의 자유를 규정한다. 

A)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사회적 가치를 형성하고 공적 논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공공 서비스나 개인사업 분야에서 해당 영역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학문적 탁월성과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학교와 대학교를 지원할 것을 촉구한다. 

B) 성경은 부패를 규탄한다. 부패는 경제발전을 침식하고 공정한 결정을 왜곡하고 사회적 응집력을 파괴한다. 어떤 국가도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최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창조적으로 사고하도록 하기 위해 일터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 기업가들을 초청한다. 

C) 우리는 젊은 기독교 학자들이 (1) 가르치고 (2) 성경적 세계관으로부터 훈련하는 것을 개발하므로 그들의 주요 관심분야에 영향을 주기 위해 세속 대학교에서 장기적으로 경력을 쌓기를 권장한다. 우리는 감히 대학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주59) 


II. 분열되고 깨어진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평화 이루기 

1.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화 

하나님과의 화해는 이웃 간의 화해와 분리할 수 없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루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된 세계에 평화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치와 연합은 하나의 실제이며(“그는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동시에 위임이다(“평안의 띠 가운데 성령의 연합을 지속하려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의 종족 간 화해 모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음의 능력이다.(주60) 

우리는 바울이 이방인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한편,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그들 간에는 차이가 없으며 구원에 있어서도 어떤 차이가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분 안에서만 한 성령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주61) 

A) 그러므로 우리는 온 교회가 메시아이며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유대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분명히 확증한다. 그리고 로마서 14-15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Messianic Jewish believers)을 받아들이고 격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서로간의 화해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추구의 근거와 동기이다. 그러한 화해 없이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진실하고 지속적인 화해는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한 인정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 상처받은 자에 대한 고백,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폭력과 억압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구현하고 적절한 보상을 구하는 교회의 결단과 헌신을 포함한다. 

B)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해와 서로간의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경적 평화를 이루는 과업과 노력에 헌신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열망한다. 


2. 종족 갈등 가운데 그리스도의 평화 

종족적 다양성은 창조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이며 계획이다.(주62) 그것은 인간의 죄와 오만으로 오염되어 혼돈과 분쟁, 폭력과 국가 간의 전쟁을 낳았다. 그러나 종족적 다양성은 모든 나라와 종족과 백성과 언어가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들로 하나가 될 때 새 창조 가운데 유지될 것이다.(주63) 우리는 종종 종족적 다양성을 진지하게 다루고지 못했으며,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창조와 구속에서 종족적 다양성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존중하지 못했고, 오래 동안 그들을 경멸한 상황이 초래한 깊은 상처를 무시했다. 

A) 우리는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종족적 다양성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가르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모든 신자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확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종족에 대한 충성심이 우리의 죄로 깨어진 것을 보여주며 종족적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인류로 구속된 정체성에 앞서지 않음을 가르쳐야만 한다. 

우리는 슬픔과 수치심을 갖고 종족적 폭력과 억압이라는 가장 파괴적인 상황과 그러한 갈등이 일어날 때 대부분의 교회들이 통탄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는 것을 탄식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종주의, 흑인노예, 유대인 학살, 인종분리주의, “인종청소,” 그리스도인들 간의 분리로 인한 폭력, 토착민들에 대한 학살, 종교간 폭력과 정치적, 종족적 폭력,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고통, 카스트 제도하의 억압, 종족적 대량학살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적 유산을 포함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동이나 무관심으로 인해 세상의 파괴를 가속화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의 증거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B)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위해 종족적 폭력과 불의 혹은 억압에 참여했던 것을 탄식하며 회개를 요청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경우에 침묵과 무자비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그러한 입장에 대한 파괴적인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하여 악에 동조했던 것을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만일 복음이 근원적인 세계관과 불의한 구조에 도전을 제기하고 변혁적 상황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악이 지배하는 날이 이를 때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맞지 않은 외투처럼 버려질 것이고 사람들은 구태의연한 충성이나 행위들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제자도 없는 복음전도나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급진적 복종 없는 부흥은 불충분한 것이며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빛나는 종족 간 화해의 모델과 갈등 해소를 위한 가장 활발한 옹호자가 될 그 날을 고대한다. 

복음에 근거한 이러한 열망은 우리에게 다음의 결단을 요청한다. 

C) 우리는 복음의 화해하는 능력의 온전함을 품으며 그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구속에 대한 온전한 성경적 이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불화를 종식시키신 것을 포함한다. 

D) 우리는 화해의 삶의 양식을 채택한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음의 행위를 할 때 나타난다. 

 1) 타인들을 대신하여 불의에 도전하는 용기를 갖고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할 때. 
 2) 화해를 구하려고 장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행동을 먼저 취하므로 갈등의 “상대방”인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환대할 때.
 3) 폭력적인 상황에서 파괴나 복수의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죽음을 감수할 때. 
 4) 교회가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와 치유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므로 갈등 이후에 나타나는 상처들을 장기적으로 치유하는 사역에 참여할 때. 

E) 희망의 등대와 희망의 담지자가 되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품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우리는 인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악한 세력들에 직면할 권세를 갖게 되며 그의 화해하시는 사랑과 평화를 이루는 능력을 갖게 된다. 

 

3.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억압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와 샬롬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헌신의 성경적 근거는 케이프타운 서약 1부 7장(c)에 요약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다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열망한다. 

노예와 인신매매 

윌버포스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던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고투를 벌였던 200년 전보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더 많은 노예들이 있다(대략 2천 7백만 명 정도). 인도에만도 대략 천 5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노예상태에 놓여있다. 카스트 시스템은 낮은 카스트 계층을 억압하고 달리트를 배척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지역에서 교회는 똑같은 차별의 형태들에 오염되어 있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노예제도들 가운데 하나인 카스트제도에 대항하기 위해 글로벌 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보편적 주장이 어떤 진정성을 갖고자 한다면, 교회는 교회 내에서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거부해야만 한다. 오늘날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이전에는 없었던 대규모 인신매매가 모든 대륙에서 이주현상과 성매매의 도구로서 여성과 아동의 노예화, 그리고 강제노동이나 징병을 통한 아동학대를 낳았다. 

A) 인신매매라는 악과 대항하여 싸우며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예언자적으로 말하며 행동하는 전 세계 교회들이 일어나자. 이것은 인신매매를 촉진하는 사회, 경제, 정치적 요소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포함해야만 한다. 전 세계 노예들은 글로벌 교회에게 “우리 아이들과 여성들을 자유케 하라.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달라. 예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사회를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외치고 있다. 

빈곤 

성경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경제정의와 개인적 긍휼, 존경과 관용을 보여주듯이, 우리는 온전한 성경을 증거해야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성경적 가르침이 초대교회와 사도바울에게도 나타났듯이, 우리는 우리의 선교전략과 실천에도 통합적으로 적용되었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주64) 

B) 밀레니엄 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가 지역교회와 글로벌 교회에게 제시된 것은 중대한 기회임을 인식하자. 우리는 교회들이 정부에 대해 그것들을 옹호하고 미가 첼린지(Micah Challenge)와 같이 그것들을 성취하려는 노력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C) 세상이 제기할 수 없는 것을 선포하고, 지나친 부와 탐욕에 도전하지 않고서는 빈곤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용기를 갖자. 복음은 만연한 소비주의라는 우상에 도전한다. 우리는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탐욕이 빈곤을 지속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부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동시에 우리는 복음이 회개로의 부름을 통해 부자들을 포용하며 용서하는 은혜로 인해 변혁된 사람들의 친교에 그들을 초청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4. 장애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전 세계적으로 대략 6억 이상이나 되는 장애인들은 가장 소수의 집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적어도 선진국에 살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집단에 속한다. 비록 육체적이나 정신적 장애가 장애인들의 일상적 경험일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사회적 견해, 불의, 그리고 자원에 접근하기 어려움으로 인해 불구를 겪고 있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것은 의료적 돌봄이나 사회적 규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교회 안에서의 포용과 평등을 위해 그들을 돌보는 자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싸우는 것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호간의 우정과 존경과 사랑과 공의로 부르신다. 

A) 장애인들에 대한 문화적 고정관념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자.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아무도 인간적인 관점으로 알지 않기” 때문이다.(주65)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는 그를 섬기기 위한 은사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섬기는데 헌신할 뿐 아니라 장애인들이 베풀 수 있는 섬김을 받는데 헌신한다. 

B)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장애인 선교에 관해 생각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장애인 신자들의 선교적 소명을 인식하고 확증하며 촉진할 것을 촉구한다. 

C) 우리는 너무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가 개인적인 죄, 부족한 믿음 혹은 치유되기 원치 않는 마음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우리는 성경이 보편적 진리로서 이러한 주장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정한다.(주66) 이러한 잘못된 거짓 가르침은 목회적으로 무감각하며 영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은 죄책감을 더하며 장애 그 자체라는 짐을 벗을 희망을 짓밟는다. 

D) 우리는 교회가 장애인들을 위한 포용과 평등의 장소로 되며,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광범위하게 그들의 필요를 옹호하며 그들과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 

 

5.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많은 나라에서 HIV-AIDS로 인한 위기는 주요 이슈이다.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백만 명이 HIV에 감염되었고,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AIDS로 인해 고아가 되었다. 하나님은 HIV-AIDS에 감염되고 그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깊은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변혁하는 능력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본이 이 세상이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HIV-AIDS에 대한 복음의 통전적 응답의 중심에 있음을 확신한다. 

A) 우리는 HIV-AIDS 감염자들에 대한 모든 비난, 적대감, 치욕과 차별을 거부하고 고발한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타락했다. 우리는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하게 판단하고 빠르게 회복하고 용서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HIV-AIDS에 걸린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종종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가 그렇게 된 것을 안타까움과 긍휼의 마음으로 인식한다.

B)  우리는 바울이 교훈했듯이, 모든 목회자들이 성적인 순결함과 신실함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고 결혼이 성적 관계를 위한 유일한 통로임을 분명하게 교육하기를 열망한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라 다수의 혼외 성관계의 유행이 대부분의 감염 국가들에서 HIV-AIDS의 급속한 파급의 주요 요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필요하다. 

C) 전 세계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 가운데 이러한 도전을 제기하자. 실제적인 후원, 자비로운 돌봄(과부와 고아들에 대한 돌봄을 포함하여), 사회정치적 주장, 교육 프로그램(특히 여성들에게 능력을 주는 프로그램들), 그리고 지역 상황에 적합한 효과적인 예방 전략들을 통해 HIV-AIDS에 의해 타격을 받은 가장 어려운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굳세게 일어서자. 우리는 교회의 통전적 선교의 일부로서 이러한 긴박한 예언자적 행동을 취할 것을 다짐한다. 


6. 고통 받는 피조물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된 성경적 위임은 케이프타운 서약 1부 7장(a)에 나온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풍성함을 보존하는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농사, 어업, 광업, 에너지 생산, 엔지니어, 건축, 무역, 의료 등과 같은 인간의 복지와 필요를 위해 피조물을 사용하는 거룩한 통치를 실현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러한 위임을 행하므로, 우리는 이 땅과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도록 명령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주인이시고 지탱하는 분이시고 구속자이시며 상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청지기직을 행한다.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포함하여 이 땅의 자원들에 대한 광범위한 남용과 파괴를 애통한다. 아마도 지금 물질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긴박한 도전은 기후변화의 위협일 것이다. 기후변화는 빈곤국가의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기후는 빈곤국가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나며, 국민들은 그러한 이상기후에 적응할 능력을 거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빈곤과 기후변화의 문제는 함께 긴박성을 갖고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A) 파괴적이거나 오염을 일으키는 소비습관을 버리는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 

B) 환경파괴와 잠재적인 기후변화의 이슈들에 관한 정치적 편의주의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정부를 설득할 합법적 수단을 행사한다. 

C) 농업, 산업, 그리고 의료를 통해 인간의 필요와 복지를 위한 지구의 자원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보전과 옹호를 통해 주거환경과 종들(species)을 보호하고 회복하는데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소명을 인식하고 격려한다. 그들은 동일한 창조자와 공급자와 구속자를 섬기려는 목표를 공유한다. 


III. 타종교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1.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종교인들을 포함한다. 

케이프타운 서약 1부 7장(d)의 견지에서, 우리는 성경적 의미에서 타종교인들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높은 소명에 응답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볼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이웃이 되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복종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소박한 사람이 아니라 온화한 사람으로, 호인이 아니라 분별하는 사람으로,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위협을 당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무가치한 개종이 아니라 복음전도를 통해 좋은 소식을 나누기 위해 부름 받았다. 사도바울의 본을 따라 설득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을 포함하는 복음전도는 “복음에 관한 청취자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자유를 전적으로 그들에게 일임하는 것으로서 복음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진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종교인들에 대한 민감성을 갖기 원하며 그들을 강제로 회심시키려는 어떤 접근도 거부한다.”(주67) 이와 대조적으로 개종은 타종교인들을 “우리처럼” 되게 하고 “우리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우리의 교파에 들어오게” 만드는 강제적인 시도이다. 

A) 우리는 모든 복음전도에 있어서 분명하게 윤리적이 될 것을 서약한다. 우리의 증거는 “깨끗한 양심을 지키는 온유함과 존경”으로 나타나야 된다.(주68) 그러므로 우리는 강제적이고 비윤리적이며, 거짓이거나 경멸적인 어떤 복음증거의 형태도 거부한다. 

B)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무슬림, 힌두교인, 불교인, 그리고 다른 타종교인들과 우정을 나누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예수의 영 안에서 우리는 솔선수범하여 타종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선한 뜻과 친절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C)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1) 타종교에 관한 거짓과 풍자를 조장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2) 인종차별적 편견과 대중매체와 정치적 견해를 통해 선동되는 증오와 공포를 고발하고 거부한다. 

D) 평화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폭력적인 공격을 당했을 때조차도 타종교인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폭력과 복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한다. 

E) 우리는 바울이 회당과 공공장소에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논쟁을 벌였던 것처럼, 타종교인들과 대화를 위한 적절한 장소를 확인한다. 기독교 선교의 합법적인 부분으로서 이러한 대화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함께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주장을 청취하려는 태도와 결합된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때로는 죽음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고통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필요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로서 우리의 선교사역에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주69) 기꺼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교의 진정성을 위한 신랄한 검증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교의 진보를 위해 고통과 박해와 순교를 사용하실 수 있다. “순교는 특히 그리스도께서 명예를 위해 약속하신 증거의 형태이다.”(주70) 안락함과 번영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기 위해 그의 부르심을 재차 상기해야 한다.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적대적인 종교문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값비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신실한 순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고문이나 박해를 견디는 것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A) 우리는 복음을 위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눈물과 기도의 간증을 듣고 기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은혜와 용기를 주실 것을 그들과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복음이 복음 증거자들에게 극히 적대적인 곳에서 열매 맺기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슬퍼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그의 복음과 그의 종들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시는 끝없는 슬픔을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으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기를 열망한다. 


3. 사랑의 행동은 은혜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권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주71) 우리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냄새인 하나님의 은혜의 향기를 풍기므로 타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맛보고 체험하게 만들므로 우리가 타종교인들 가운데 살아가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우리는 모든 문화적, 종교적 상황에서 복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삶과 섬김의 행위를 통해 타종교인들을 사랑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변혁적인 은혜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수치와 복수가 종교적 율법주의와 결합된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은혜”는 생소한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연약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매우 이국적이며 반발을 일으키는 개념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은혜는 감히 그 경험을 하려고 매우 갈망하는 사람들에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된 경험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서히 스며든다. 

A)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척당하고 위험에 처한 문화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냄새와 맛을 풍기기 위해, 타종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어려운 곳에서 살며 사랑하고 섬기며 장기적으로 헌신할 은혜로 충만한 남녀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세우시기를 열망한다. 


4. 사랑은 제자도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위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은 여러 종교들에게서 발견된다. 내부자 운동은 예수를 그들의 하나님과 구세주로 따르는 집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를 준수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이 속한 사회문화적 공동체 안에 살아가면서 예수와 성경을 중심으로 친교, 가르침, 예배, 기도를 위한 소그룹 모임을 가진다. 이것은 복합적인 현상이며 그 현상에 대해 응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부자 운동의 혼합주의적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러나 혼합주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에서 신앙을 표현하듯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위험이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법이나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때, (1) 성급하게 내부자운동을 분류하고 그것을 일련의 새로운 선교전략으로 추진하거나 혹은 (2) 민감하게 현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성급하게 비난하는 경향을 피해야만 한다. 

A) 안디옥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한”(주72) 바나바의 심정에서 우리는 이 이슈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의 사항들을 권고한다. 

 1) 사도적 결정과 실천을 주요 원리지침으로 취한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주73)
 2) 관점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겸손과 인내와 호의를 실천하며 귀에 거슬리는 상호 비난을 배제한 대화를 한다.(주74) 


5. 사랑은 흩어진 사람들에게 파급된다. 

사람들은 전례 없이 이동을 하고 있다. 이주는 이 시대의 중대한 글로벌 실재들 가운데 한 현상이다. 2억 명이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 밖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추정된다. 여기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의 출생지를 떠난 사람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의 상태로 살아간다: 일을 찾는 경제적 이주자들,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내부적으로 격리된 사람들, 난민과 망명 요청자들, 인종청소의 희생자들, 종교적 폭력과 박해의 도피자들, 가뭄이나 홍수, 혹은 전쟁으로 인한 기근 피해자들, 도시로 이주한 농촌 빈곤의 희생자들. 우리는 현대의 이주현상에 수반될 수 있는 악과 고통을 무시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교적 목적 안에 있는 것을 확증한다.(주75) 

A)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디아스포라들 가운데서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전략적 계획과 그들을 훈련하고 자원을 구비하는데 집중하면서 글로벌 이주현상과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의해 제기된 선교적 기회들을 인식하고 응답할 것을 권고한다. 

B) 우리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주자 공동체들이 산재한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타인들을 사랑하고 외국인들의 복지를 변호하며, 갇힌 자들을 방문하고 환대를 실천하며 우정을 쌓고, 자신들의 집을 개방하며 도움과 섬김을 제공하라는 광범위한 성경적 명령에 순종하므로 행위와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대항문화적 증거를 담지할 것을 촉구한다.(주76) 

C) 우리는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증거를 품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기회를 얻으려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원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다.(주77)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나라에서 우리는 이주민 교회와 토착교회가 함께 경청하고 서로 배우며 그들의 나라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려는 공동의 노력을 시작할 것을 권고한다. 


6.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에 영향을 미친다. 

박해에 직면하여 종교의 자유 수호를 통한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과 양립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학대를 당하거나 우리 자신의 권리를 상실하는 것과 인권침해가 이루어지는 상황 가운데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목소리를 내는데 헌신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또한 우리는 타종교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해야만 한다. 우리는 타종교를 진리로 수용하지 않고도 타종교인들의 자유를 변호할 수 있다. 

A)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자. 이것은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인들을 대표하여 정부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주창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B)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복지를 추구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을 행하고 평화롭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성경적 가르침에 복종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명령하거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만일 국가가 우리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야만 한다.(주78) 

모든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모든 합법적 노력들 가운데 가장 깊은 열망은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믿어야 하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IV. 세계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기 

1. 미전도 종족과 선교에서 소외된 종족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통해 아직도 그러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 개의 미전도 종족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깝고도 수치스럽게 인정한다. 이 종족들 가운데 신자들도 없고 교회도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가 없거나 그들과 복음을 나누려는 시도를 하는 선교단체도 없다는 점에서, 미전도 종족들 가운데 많은 종족들이 선교에서 소외된 종족들이다. 실로 아주 미미한 퍼센트의 교회 자원들(인적, 물질적 자원)이 가장 소외된 미전도 종족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분명히 이들은 좋은 소식에 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초청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 삼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지 2,00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미전도 종족들의 존재는 우리의 불순종과 영적 불의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사람의 요청”을 침묵한 것에 대한 꾸지람이다. 

전 세계 교회는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A)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그들 가운데 복음을 나누려는 긴박성의 결핍을 회개한다. 

B)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성육신적 사랑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갖고 그들 가운데서 복음으로 살아가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그들을 일깨우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진리를 말씀과 행위로 소통하려는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다짐한다. 

C) 성경은 복음전도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성경이 말하는 빈곤의 근절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아직도 모국어로 갖고 있지 않은 종족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을 서두른다.
 2) 성경의 메시지가 구전의 방법으로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아래의 구전문화를 보라.) 

D) 성경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을 훈련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무지를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우리는 사역과 연합과 성숙함 가운데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사로잡는 교회성장을 위한 성경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참신한 신념을 열망한다.(주7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목회자와 교사로서 교회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의 은사를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그들을 찾아내어 격려하고 훈련하고 지원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소수의 유급 전문직 사역자나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로 제한하는 성직주의를 거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목양하고 가르치는 분명한 은사를 갖고 있는 많은 남녀들이 비공식적이거나 공식적인 교단구조는 없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성령의 축복 가운데 그들의 은사를 발휘한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다룬다는 인정을 받고 격려를 받으며 구비되어야 한다. 
 2) 우리는 현재 종이와 펜과 연필을 요구하는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므로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연구하는 디지털 방식을 권장하여 사람들의 성경을 읽고 쓰는 능력을 촉진해야만 한다. 

E) 우리는 복음 자체가 성경적으로 타당한 선교의 원천이며 내용이고 권위인 까닭에 우리의 모든 선교사역의 통합적 영역의 핵심에 있는 복음전도를 유지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구원사역에 대한 구체적 실현과 선포가 되어야만 한다. 


2. 구전문화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읽고 쓸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배울 수 없는 구전적(oral)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며, 반 수 이상은 위에서 정의한 대로 미전도 종족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 한 구절도 갖고 있지 않은 인구가 3억 5천만 명이나 된다. “초보적인 구전 학습자들” 이외에 많은 “이차적인 구전 학습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술적으로는 읽고 쓸 수 있지만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시각적 학습의 부상과 이미지의 지배로 인해 구전적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구전에 대한 이슈를 인식하고 행동을 취할 때,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A)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함에 있어서 읽고 쓸 수 있는 신자들에게도 구전 방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 

B) 우선적 관심사로서 미전도 종족과 선교에서 소외된 종족들의 주요 언어로 된 구전형태의 이야기 성경이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C) 개척 전도자들과 교회 개척자들을 위한 적절한 구전 훈련과 더불어 복음전도를 위한 구전 성경 이야기에 대한 기록과 배포, 제자훈련과 리더십 훈련을 포함하여 구전 전략들을 개발하도록 선교단체들에게 권고한다. 그들은 스토리텔링, 춤, 예술, 시, 암송, 그리고 연극을 포함하여 구원에 대한 전반적인 성경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효과적인 구전적이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다. 

D) 남반구의 지역교회들이 미전도 종족들의 세계관과 밀접한 구전 방법들을 통해 그 지역에 있는 미전도 종족들과 관계를 맺도록 장려한다. 

E) 신학교들이 구전 방법론으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훈련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제공하도록 장려한다. 


3. 그리스도 중심 지도자들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급속한 성장이 피상적이고 취약한 상태인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훈련을 받은 지도자들의 부족과 세속적인 권력과 오만한 지위 혹은 개인의 부를 위해 자신들의 지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당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수치를 당하고 있고 복음적 선교는 손상되고 있다. “리더십 훈련”은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우선적 해결방법이다. 실질적으로 모든 종류의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들이 계속적으로 개발되었으나, 두 가지 예측되는 이유들로 인해 리더십 훈련의 문제가 상존한다. 

첫째,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닮도록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기본적인 성숙한 제자직의 자질을 이미 보여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먼저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해야만 한다.(주80) 만일 오늘날 우리가 거의 제자훈련을 받지 않은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그들의 리더십 개발을 위해 기본적 제자훈련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세속적 리더십의 척도는 환원적 복음전도와 제자훈련에 대한 경시, 그리고 피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세대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리더십의 실패에 대한 해답은 단순히 더 많은 리더십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제자훈련이다. 지도자들은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둘째, 어떤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들은 경건한 성품을 무시하는 사전 포장된 지식, 테크닉, 기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정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종의 심성과 겸손, 온전함, 순결함, 욕심 없는 마음, 기도,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의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자들로서 그리스도를 닮아야만 한다. 더욱이 어떤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들은 바울이 그의 지도자의 자질 목록에 포함시킨 하나의 핵심 기술-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능력-에 대한 구체적인 훈련이 결핍되어 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제자훈련의 주요 수단으로서 현대교회 지도자들에는 가장 부족한 심각한 요소이다. 

A) 우리는 새 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장기적인 사역을 통해 고도로 집중적인 제자훈련을 시키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교회에게 허락하신 지도자들의 성숙함과 종의 자세라는 성경적 기준에 부합한 모습을 보기를 열망한다. 

B)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려는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다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적으로 신실하고 순종적인 지도자들을 더 많이 배출하시고 보호하시며 격려하실 것을 열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더럽히며 복음의 능력을 손상시키는 지도자들을 꾸짖으시고 제거하시며 회개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닮으려는 열망을 가진 제자로 훈련된 새로운 세대의 종 된 지도자들을 일으키시기를 기도한다. 

C)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주어진 책무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책무 집단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한다. 

D) 우리는 신학교와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모든 이들이 단지 지식을 나누어주거나 등급을 매기기는 것이 아니라 영성과 인격형성에 보다 집중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포괄적인 “전인적” 리더십 개발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4. 도시 

도시는 인간의 미래와 세계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는 주로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1) 차세대 젊은이; (2) 대부분의 이주한 미전도 종족들; (3) 문화 형성자들; (4) 최상위 빈곤층. 

A) 우리는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급속한 도시화 현상을 목격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을 깨닫고 도시선교의 긴박성과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므로 실제적인 현상에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거룩한 분별력과 그리스도의 긍휼로 도시를 사랑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도시의 안녕과 복지를 추구하라는”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도시화 현상의 실재에 응답하는 적합하고도 유연한 선교방법들을 습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 어린이 

모든 어린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전 세계에는 약 10억 명의 어린이들이 있으며, 그 절반은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수 백 만 명의 어린이들은 번영이라는 위험에 처해 있다. 부유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은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갖고 있으나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단순히 미래교회의 주역이 아니라 현재 교회의 주역이다.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선교의 의욕적인 대행자들로서 막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그 음성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태도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미지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대표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섬기는 훌륭한 사역을 기뻐하고 그 필요성으로 인해 그 사역이 확장될 것을 열망한다. 성경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그들의 기도, 그들의 통찰력, 그들의 말, 그들의 창의성-을 사용하실 수 있고 사용하신다. 그들은 세상을 변혁할 “새로운 에너지”를 의미한다. 성인들의 합리적인 접근방법으로 그들의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영성을 억누르지 말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자. 

A)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목적을 반영하는 참신한 성경적 신학적 질문을 재발견하고 “사람들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주81) 세우신 예수님의 도발적인 행위에서 나타나는 신학과 선교의 심오한 중요성을 재발견하므로 어린이들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B) 우리는 어린이들의 가족이나 공동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각각의 어린이와 젊은이 세대 사역과 그들을 통한 통전적 사역이 세계선교의 중요한 요소라는 확신 가운데 전 세계 어린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인력을 훈련하고 모든 자원들을 제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C) 우리는 폭력, 착취, 노예, 인신매매, 매춘, 성차별과 인종차별, 기업사냥, 고의적인 유기를 포함한 모든 어린이 학대의 실상을 폭로하고 저항하며, 그에 대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6. 기도 

모든 우선적 관심사들 가운데, 기도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자. 기도는 부르심이고 명령이며 은사이다. 기도는 모든 선교의 요소들을 위한 본질적 근거이며 원천이다. 

A) 우리는 연합과 집중과 지속성과 성경에 근거한 명료성을 갖고 기도할 것이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세계 곳곳에 일꾼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2) 우리는 모든 종족들과 지역에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선포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증거를 통해 성령으로 잃어버린 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위해 기도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과 행위와 말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고 높임을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외칠 것이다.
 4)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 공의와 창조의 청지기직과 돌봄,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의 축복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B)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가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그 날을 고대하며 열방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서 늘 감사할 것이다. 


V. 그리스도의 교회가 겸손과 온전함과 단순성으로 회귀하라는 부르심 

걸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일상의 행위에 대한 성경적 은유(methphor)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만 하는 것과 걸어가지 말아야만 하는 것에 대해 7차례 언급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구별된 새로운 인류로서 걸어가기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길을 따라 걷거나 아니면 다른 신들의 길을 따라 걷는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하나님 세상의 열방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하고 열방들의 축복의 통로로 부르신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성경은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우상숭배이다. 만일 열방이 오직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섬기는 거짓 신들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비참한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차이가 없을 때-예를 들어 부패와 탐욕적 습관, 성적 방종, 이혼율, 기독교 이전의 종교적 관습으로의 회귀, 타 인종들에 대한 태도, 소비주의적인 삶의 방식, 혹은 사회적 편견에 있어서-세상은 기독교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의구심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어떤 진정성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A) 우리는 모든 문화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우리 주변의 문화의 우상들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서로에게 도전을 제기한다. 우리는 거짓 신들과 교회 안에 내재한 우상들을 확인하여 폭로하기 위한 예언자적 분별력과 주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로 그들이 회개하고 우상숭배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얻도록 기도한다. 

B) 성경적 삶(윤리)이 없는 성경적 선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긴박성을 갖고 우리자신의 헌신을 재차 다짐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세상의 방식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며 “참된 의와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인간이 되도록” 도전한다. 


2. 혼잡한 성적인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사랑 안에서 걸어가자. 

하나님의 창조의 설계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의 헌신된 신실한 관계로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혼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가족과 구별된 새로운 사회적 개체 안에서 한 육체가 되며, “한 육체”의 표현으로서 성적 관계는 결혼이라는 서약 안에서만 누리는 것이다. 결혼을 통해 “둘이 하나가 되는” 이러한 애정이 충만한 성적 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와 새로운 인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을 반영한다.(주85) 바울은 혼잡한 성적 방종으로 가장한 가식적 사랑과 그에 따르는 모든 추악한 행위를 하나님의 사랑의 순결함과 대조한다. 성경이 말하는 혼전 성관계나 혼외정사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난잡한 성적 관계는 창조와 구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축복에서 벗어난다. 혼잡한 성을 포함하는 남용과 우상숭배는 결혼과 가족의 해체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쇠퇴를 초래하며 믿을 수 없는 고독과 착취로 인한 고통을 낳는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이슈로 부각되며, 통상적으로 비극적인 리더십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의 실패에 대한 깊은 겸손과 자각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기준에 따라 사는 (윤리적) 삶으로 우리가 인도되기를 열망한다. 

A) 우리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다음의 결단을 강하게 촉구한다.

 1) 우리는 건강한 관계와 가정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담긴 좋은 소식을 긍정적으로 선언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적 정직함으로 주변 문화의 깨어진 역기능적 실재들을 다루면서 교회 내에서 성에 관한 보다 개방된 대화를 촉진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명백하게 가르치며 성적 유혹과 죄에 대해 우리 모두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목회적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3) 성적 신실함에 대한 성경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긍정적 실례를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B) 우리는 신자들로서 다음의 헌신을 다짐한다. 

 1)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와 사회에서 신실한 결혼생활과 건강한 가정생활을 강화해야 한다.
 2)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독신과 과부 혹은 자녀가 없는 자들을 환대하고 도움을 주는 가족임을 확증하고 그들이 교회의 사역에서 온전하게 자신들의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실재와 그들이 기여한 점들을 인정해야 한다.
 3) 우리는 포르노, 간통, 난교를 포함하여 우리의 주변문화 안에 존재하는 혼잡한 성적 방종의 다양한 형태들을 퇴치해야 한다.
 4) 우리는 사람들을 동성연애 행위로 끌어들이는, 매우 핵심적인 정체성 이슈들과 경험과 연관된 이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점들을 제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과 공의로 그들에게 다가가며, 모든 형태의 증오와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의 희생에 대해 규탄해야 한다.
 5)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로 인해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권력이라는 우상을 거부하고 겸손 가운데 걸어가자.(주86) 

우리의 타락과 죄로 인해 권력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성, 인종, 혹은 사회적 지위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우리 자신을 높인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서로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훈계를 하며 자만과 권력이라는 우상숭배의 모든 표시들에 반대한다. 이러한 상호 복종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과 사회경제적 관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A)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에 관한 성경의 교훈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한다. 

B) 우리는 목회자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상호 복종에 대해 신자들이 이해하고 솔직하게 논의하며 실천하도록 권장하며 도움을 준다. 탐욕과 권력과 학대가 만연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온유한 겸손과 헌신적인 사랑의 처소로서 인식하도록 교회를 부르고 있다. 

C) 우리는 특히 남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에 관한 책임의 균형을 주목하기를 원한다. 상호 복종이 의미하는 바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이 교회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모든 문화 안에서 언어나 감정, 혹은 육체적인 학대나 아내를 학대하는 어떤 형태의 학대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양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문화적 관습이나 왜곡된 성경해석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행동이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죄로 단호하게 비난하며,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회개와 중단을 요청한다. 


4. 성공이라는 우상을 거부하며 온전함 가운데 걸어가자. 
 
우리는 부정직함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님의 진리의 왕국을 건설할 수 없다. “성공”과 “결과”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는 거짓으로 점철된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을 하며 우리의 온전함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은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주88) 

A) 우리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우리의 사역을 나타내는 온전한 진실함 이외의 것들의 유혹에 저항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거짓 통계로 우리의 보고를 과장하거나 무엇을 얻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때 부정직하게 된다. 우리는 정직함으로 깨끗하게 되고 왜곡과 조작과 과장을 버리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모든 이들이 적절한 책무를 위한 필요 이상의 측정 가능하고 가시적인 결과들을 내놓기 위한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채우려고 영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를 요청한다. 온전함과 투명성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자.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검증하고 온전함과 청렴함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빛과 진리 가운데 걸어가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주89) 


5. 탐욕이라는 우상을 거부하고 단순성 가운데 걸어가자.(주90)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번영의 복음”에 대한 선포와 가르침은 중대한 관심사로 제기된다. 우리는 번영의 복음을, 신자들이 건강과 부의 축복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으며 긍정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와 재정적이나 물질적 선물을 통해 “씨를 뿌림으로” 건강과 부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번영에 대한 가르침은 전 세계 많은 교파들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주91)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와 능력을 확증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초월적인 능력 가운데 소망의 믿음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교회성장과 사역을 환영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자동적인 것이거나 인간의 기술로 이루어지거나 인간의 말이나 행위나 은사나, 목적이나 관습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번영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갖고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가르침에 물질적 번영(건강과 부)을 포함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축복이 물질적 축복에 의해 측정되거나 부가 항상 하나님의 축복의 징표라는 주장을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거부한다. 성경은 부가 항상 억압, 허위, 혹은 부패에 의해서도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빈곤, 질병, 혹은 단명이 항상 하나님의 저주의 증표나 부족한 믿음의 증거, 혹은 저주의 결과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러한 획일적이고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번영의 복음을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이 성경을 왜곡한다고 확신한다. 또한 그들의 행위와 삶의 방식이 종종 비윤리적이고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대개 진정한 복음전도를 기적 추구로 대체하며 회개로의 요청을 설교자가 소속된 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 안에서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이 목회적으로 해를 끼치고 영적으로 불건전한 것임을 탄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거나 빈곤과 고통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주요한 것임을 확증한다. 번영의 복음은 빈곤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하며,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에 대한 참된 메시지와 구원의 수단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분명히 번영의 복음은 거짓된 복음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 잡힌 성경적 기독교와 양립하지 않는 번영에 대한 지나친 가르침을 거부한다. 

A)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 지도자들이 번영의 복음이 만연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으로 그 가르침을 검증할 것을 긴급하게 촉구한다. 특히 우리 모두는 성경적 상황과 적절한 균형 가운데 대개 번영의 복음을 지지하는 관련 성경 본문들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빈곤 상황에서 번영에 대한 가르침이 제시될 때,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와 지속적인 변혁을 초래하는 참된 긍휼과 행동으로 그러한 가르침에 대항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기 유익과 탐욕을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직의 표지들로서 자기희생과 관대한 베풂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우리는 단순한 삶의 방식이라는 로잔운동의 역사적 요청을 확증한다. 


VI. 선교의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동반자 협력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서로 간의 화해에 근거한 하나님의 창조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이중적 화해는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다. 우리가 일치 안에서 살아가고 동반자 협력 가운데 일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초자연적이고 대항문화적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연합하지 못하고 일치를 파괴할 때, 우리의 선교사역과 메시지를 천박하게 만들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 

1. 교회연합 

분열된 교회는 분열된 세상을 위한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화해된 일치 안에서 살아가는 데 실패하는 것은 선교의 진정성과 효율성을 방해하는 주요 장애물이다. 

A) 우리는 교회와 단체들의 분열과 대립을 통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의 성령을 구하며 “평안의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모든 일에 힘쓰라는” 바울의 권면에 복종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B) 우리는 가장 심오한 일치가 영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가시적이고 실천적이며 실제적인 일치와 연합의 선교적 능력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열망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공동의 증거와 선교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자 하는 유혹을 거부하고 어느 곳에서나 화해와 회복된 일치의 통로를 찾고자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2. 글로벌 선교의 동반자 협력 

선교의 동반자 협력은 단순히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으로 전략적이고 실제적인 일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인종, 교파, 신학적 정체성 등)을 우선시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선교사역을 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주님에게 우리의 사랑과 열정을 드리지 못했다. 우리의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중심성은 신앙의 고백 이상의 것으로서, 우리의 전략과 실천과 연합과 일치를 결정한다. 우리는 다수세계의 부상하는 선교운동의 성장과 동력, 그리고 “서구에서 비서구로”라는 기존의 낡은 형태의 종식을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적 책임의 지휘봉이 세계교회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사악한 영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 서구의 승리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떤 한 종족 집단이나, 국가, 혹은 대륙이 지상대위임령을 완전히 성취하는 배타적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자이다. 

A) 우리는 세계선교에 함께 공헌할 동일한 기회를 갖고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교회 지도자와 선교 지도자들로 함께 협력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같은 대륙이나 같은 신학적 학파나 같은 조직, 혹은 우리와 친밀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아닐 때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가운데 의심과 경쟁심과 자만심을 버리고 그들에게 배우자.

B) 동반자 협력은 돈 이상의 것이며, 돈에 대한 분별없는 투자는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분열시킨다. 대부분의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원리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자. 우리 자신이 선호하는 다른 교회의 이름, 슬로건, 프로그램, 시스템, 그리고 방법을 더 이상 강요하지 말자. 대신 북과 남 그리고 동과서의 참된 상호관계와 주고받는 상호의존, 그리고 선교에 있어서 진정한 우정과 참된 동반자를 특징짓는 존경과 존엄성을 위해 노력하자. 


3. 남녀의 동반자 협력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녀를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이 땅의 지배권을 주셨다고 기록한다. 죄가 하나님에게 반역을 도모한 남녀를 통해 인간의 삶과 역사에 들어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남녀에게 동등하게 구원과 수용과 화합을 허락하셨다.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와 아들과 딸들에게 똑같이 예언의 영을 부어주셨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은 창조, 죄, 구원, 그리고 영에 있어서 동등하다.(주92) 
우리 남자와 여자, 결혼한 자들과 미혼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로서 다른 이들의 유익과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과 그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선물들을 사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교회에 봉사하도록 주신 모든 은사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주93)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역을 멸시하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만 한다.(주94)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지위와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부름의 소명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은사를 사용하고 책임지도록 부름받았다. 

A) 우리는 다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로잔의 역사적 위치를 확증한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어지며 복음화를 위한 그들의 동반자 협력은 공동의 선을 위해 기쁘게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주95) 우리는 성경 시대부터 현재까지 남녀에 대한 사역을 통해 세계선교에 기여한 여성의 놀라운 희생적 공헌을 인정한다. 

B) 우리는 성경에 대해 신실하게 복종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주장하는 상이한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이들은, 여성은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사도적 가르침을 해석한다. 다른 이들은, 여성의 영적 동등성과 초대교회에서 여성의 교화적인 예언의 은사 활용, 그리고 여성의 가정으로 신자들을 초대하는 것들을 지도력을 발휘하고 가르치는 영적 은사들이 남녀의 사역으로 수용되고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주96) 우리는 이 논의의 다른 측면들에 관해 다음의 접근과 태도를 요청한다. 

 (1) 우리가 견해의 일치를 보지 않을지라도, 분열과 파괴적인 언사, 혹은 서로에 대한 천박한 적대감을 갖지 않기 위해, 우리는 논쟁의 주제들과의 연관성에서 비난을 불식하고 서로의 견해를 수용한다.(주97) 
 (2) 원 저자들과 현대의 독자들의 문화적 상황을 간주하며 조심스럽게 함께 성경을 연구한다. 
 (3) 엄청난 고통이 있는 곳에 우리가 긍휼을 보여주고, 불의와 온전함이 결핍된 곳에 굳건하게 맞서며, 형제자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분명한 역사에 저항하는 곳에서 우리가 회개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4) 세속적인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를 반영하는 남녀의 사역에 헌신한다.

C) 우리는 바울이 교회들에게 권고했듯이(주98) 선한 것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인 경건한 여성들을 인정하고, 여성들이 교육, 봉사, 리더십과 특히 복음이 불의한 문화적 전통에 도전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회의 문을 대폭적으로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여성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활용하거나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을 열망한다.  


4. 신학교육과 선교 

신약성경은 복음전도 사역과 교회개척(사도바울의 교회개척) 사역, 그리고 양육 사역(디모데와 아볼로의 사역) 간의 긴밀한 동반자 협력을 보여준다. 이 두 과제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기” 전에) 복음전도의 측면에서 제자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한 지상대위임령에 통합된다. 신학교육은 복음전도를 넘어서는 선교의 일부이다.(주99) 지상에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고, 신학교육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를 강화하며 교회의 선교를 수반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신학교육의 목적은 목사-교사들이 신실함과 상관성과 명확성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도록 구비하며, 그들이 목사와 교사로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훈련하는 데 있다. 둘째, 신학교육의 목적은 모든 문화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상관적으로 소통하는 선교적 과제를 위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구비하는 데 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처럼(주100) 신학교육은 영적 전쟁과 연관된다. 

A) 교회와 선교단체들을 이끌어 나가는 우리는 신학교육이 본질적으로 선교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학문적 기관 안에서 신학교육의 위치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의 선교를 섬기기 때문에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우리들은 의도적으로 선교적임을 확신해야 한다.

B) 신학교육은 모든 형태의 선교적 사역과 동반자 협력 관계를 갖는다. 우리는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차원, 그리고, 현지, 국내적, 지역적, 국제적 차원에서 성경적으로 충실한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고 후원할 것이다.

C) 우리는 신학교육 기관과 프로그램이 진정으로 그들의 문화에서 교회가 직면하는 필요를 채우고 기회를 살리는 데 공헌한다는 확신으로 그들의 커리큘럼, 구조, 그리고 정신에 대한 “선교적 검증” 촉구한다. 

D) 우리는 모든 교회 개척자들과 신학교육자들이 단지 교리적 진술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들의 동반자 협력의 중심에 성경을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전도자들은 그들의 메시지의 내용과 권위의 최상의 원천으로 성경을 사용해야만 한다. 신학교육자들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모든 연구와 적용 분야에 통합하고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훈련으로서 성경연구를 핵심요소로 재강조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신학교육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책임을 감당하도록 목사-교사들을 구비하는 데 이바지해야만 한다.(주101) 


결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과 화해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사랑의 대사들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교회를 케이프타운으로 부르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셨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만나셨던 것처럼 그의 말씀의 약속을 지키셨다.(주102)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자 힘썼다. 그리고 그의 자비와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의 음성을 듣고자 갈망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강해, 본회의 발표, 그리고 그룹토의에서 나온 많은 견해들을 통해 두 가지 반복된 주제들이 나타났다. 

  • 수적인 성장뿐 아니라 질적인 성장을 위하여 지속적인 성숙을 이루는 급진적인 복종적 제자직의 필요성. 
  •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성장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성장을 위하여 일치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십자가 중심의 화해의 필요성.  

제자직과 화해는 우리의 선교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우리는 천박함과 제자직의 결핍이라는 수치와 분열과 사랑의 결핍이라는 수치를 안타깝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약점들은 우리의 복음증거를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도전들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그리스도께서 가장 안타까운 심정으로 교회에게 하신 말씀들 가운데 두 개의 말씀들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근본적인 위임령을 주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근본적인 선교의 방법을 교훈하셨다. 예수께서 2000년 후에 전 세계에서 모인 그의 백성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놀라지 말고 오히려 주인의 음성 듣기를 기뻐해야만 한다. 제자삼고 서로 사랑하라. 

제자 삼으라 

성경적 선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겸손함, 사랑, 온전함, 관대함, 그리고 종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그를 따름으로써 그를 닮아야만 한다. 제자직과 제자 삼는 데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선교의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의 내용에 새롭게 다가서게 한다: “와서 나를 따르라” “가서 제자 삼으라.” 

서로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다.(주103)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아버지여,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기도하셨다.(주104) 이 명령과 기도는 선교적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간절하게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세계복음화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에게 복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부르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참신한 명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주105)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에 복종하는 헌신을 새롭게 다짐한다.(주106)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화해를 이룬 사랑의 일치 가운데 살아갈 때, 세상은 예수를 알게 되고 우리가 그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구원의 은혜라는 유일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성경적 제자직이라는 개혁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의 혁명을 진정으로 열망하며 기도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이름 안에서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헌신을 다짐한다. 

번역: 최형근 교수(서울신학대학, 선교학박사, 국제로잔 동아시아 지역 디렉터) 

주. [56] 데전 1:3 [57] 엡 2:10 [58] 골 3:23 [59] 1981년 유엔총회 전임 의장인 찰스 하비브(Charles Habib)는 "대학에 대한 기독교적 비평"이라는 제목의 파스칼 강연에서 주장했다. "대학은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명확한 지점이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다시금 대학생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 더 큰 섬김과 복음적 운동은 없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 효율적인 수단으로 대학을 변화시킨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60] 엡 1:10; 2:1-16; 3:6; 갈 3:6-8. (6장 선교의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동반자 협력을 참조하라.) [61] 엡 2:11-22; 롬 3:23; 롬 10:12-13; 엡 2:18 [62] 신 32:8; 행 17:26 [63] 계 7:9; 21:3, 계 21:3 본문에는 "그들은 그의 백성들(복수)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64] 행 4:32-37; 갈 2:9-10; 롬 15:23-29; 고후 8–9 [65] 고후 5:16 [66] 요 9:1-3 [67] 마닐라 선언문, 12 [68] 벧전 3:15-16. 행 19:37과 비교하라. [69] 고후 12:9-10; 4:7-10 [70] 마닐라 선언문, Section 12 [71] 고후 2:15 [72] 행 11:20-24 [73] 행 15:19 [74] 롬 14:1-3 [75] 창 50:20 [76] 레 19:33-34; 신 24:17; 룻 2; 욥 29:16; 마 25:35-36; 눅 10:25-37; 14:12-14; 롬 12:13; 히 13:2-3; 벧전 4:9 [77] 렘 29:7 [78] 렘 29:7; 벧전 2:13-17; 딤전 2:1-2; 롬 13:1-7; 출 1:15-21; 단 6; 행 3:19-20; 5:29 [79] 엡 4:11-12 [80] 딤전 3:1-13; 딛 1:6-9; 벧전 5:1-3 [81] 막 9:33-37 [82]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다음의 본문들은 모두 "걸어간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엡 2:2; 2:10; 4:1; 4:17; 5:2; 5:8; 5:15 [83] 엡 4:16-31 [84] 엡 5:1-7 [85] 엡 5:31; 2:15 [86] 엡 5:15–6:4 [87] 엡 5:8-9 [88] 엡 5:10 [89] 대상 29:17 [90] 엡 5:5 [91] 로잔 신학위원회가 소집한 아프리카 신학자들이 내놓은 "아크로퐁 진술: 번영신학 비판"의 전문(The Akropong Statement: A critique of the Prosperity Gospel)을 참조하라. at: www.lausanne.org/akropong [92] 창 1:26-28; 창 3; 행 2:17-18; 갈 3:28; 벧전 3:7 [93] 롬 12:4-8; 고전 12:4-11; 엡 4:7-16; 벧전 4:10-11 [94] 데전 5:19-20; 딤전 4:11-14 [95] 마닐라 선언문, Affirmation 14 [96] 딤전 2:12; 고전 14:33-35; 딛 2:3-5; 행 18:26; 21:9; 롬 16:1-5, 7; 빌 4:2-3; 골 4:15; 고전 11:5; 14:3-5 [97] 롬 14:1-13 [98] 딛 2:3-5 [99] 골 1:28-29; 행 19:8-10; 20:20, 27; 고전 3:5-9 [100] 고후 10:4-5 [101] 딤후 2:2; 4:1-2; 딤전 3:2b; 4:11-14; 딛 1:9; 2:1 [102] 레 26:11-12; 마 18:20; 28:20 [103] 요 13:34; 15:12; 17 [104] 요 17:21-23 [105] 엡 4:1-6; 골 3:12-14; 데전 4:9-10; 벧전 1:22; 요일 3:11-14; 4:7-21 [106] 요일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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