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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묵상

부활의 아침

discipler 2007. 4. 7.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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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사무실 근처에 있는 양화진을 방문하였다. 특별히 오늘은 윌리암 부스가 창설한 구세군의 사령관들이 사관복을 입고 와서 구세군 선교사의 묘 앞에서 성대한 기념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눈에 뛰었다. 곳곳에는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어떤 집사님으로 보이는 여자 분은 한 선교사의 무덤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양화진은 선교사들의 묘비를 돌아보며 그들의 귀한 섬김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한다. 왜 이렇게 매일 많은 사람들이 이곳 양화진을 오가는 것일까? 이곳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에 한국에 복음을 들고 들어 온 수 많은 선교사들의 무덤으로써 이들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떨 때는 복음을 들고 한국을 떠나 타문화권에 선교사로 나가는 신임 선교사들이 이곳을 들러 기도와 헌신을 재다짐하며 먼저 가신 선교사님들의 삶을 묵상을 하기도 한다.

이번엔 나의 발걸음이 아펜젤러 선교사의 무덤 옆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묘비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부활주일날 이곳에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속박하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렇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의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의 땅에 주의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바로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신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시기가 공교롭게도 바로 부활절 아침이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전도종족이었던 조선 땅은 복음의 빛에서 완전히 가리워져 있었고, 오직 영적인 어둠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랬기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들의 헌신과 기도로 인해 조선땅에 복음의 빛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어둠이 벗기워진 것이다. 이것은 오직 부활의 복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던 조선의 사람을 자유케 한 것은 바로 부활의 복음이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이 부활의 능력이 조선 땅을 휩쓸었을 때 조선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민족이 되었다. 이제 성령님을 통해 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또 다른 사람과 민족을 위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금 선교적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재헌신 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기에

p.s 부활절 아침 부활의 복음을 들고 조선에 온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 학당. 정동 감리교회, 성경번역을 하였고, 조선에 들어온 지 17년이 지난 1902년 목포 성서번역위원회 참석하러 갔다가 배가 충돌했다. 아펜젤러는 구명보트를 던져 주어, 아이를 건지고 정작 자신은 풍랑에 몰려 가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 이후에도 아펜젤러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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