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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휘튼선언

discipler 2007. 5. 9. 10:16
변혁: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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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983년 6월의 2주 동안, 30개국의 개교회와 기독교 선교기관과 원조단체들로부터 온 우리는 미국 휘튼대학에 모여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의 과업에 대해 기도하고 상고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빈곤무력감억압이라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주변화된 사람들 사이에 위치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세계의 풍요한 지역에 위치한 교회에서 왔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삶을 나누며, 소집단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인간개발과 변혁에 대한 논문들을 고찰하며, 인간 필요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기술해 놓은 사례연구와 역사의 시사점들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에, 우리는 서로의 도움에 부응하는 길을 찾았다(출3:7-9 ; 약5:1-6). 우리는 괴롬당하는 하나님의 세계와 교회의 일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에 관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오시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거기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서로 손잡고 고통의 원인을 해소하라는 거대한 도전이 각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앞에 있는 것을 본 우리는 예수님 복음의 자유케 하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그 어느 때 이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평화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기꺼이 재확인한다. 그것은 오직 그분만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원수된 것을 끝내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엡2:14-17). 나아가 우리는 오직 복음을 전파함으로써만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가 채워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도를 하나의 별개의 주제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도를 인간의 요구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총체적 부응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마28:18-21).

덧붙여서 로잔언약과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에 관한 협의”(CRESR, Grand Rapids, 1982) 보고서가 이미 표명한 것을 단순히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을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이 성명을 내는 것은 최종적인 말을 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성경과 경험 양자는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필요에 직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개교회나 선교단체가 목회와 선지자 역할을 둘 다 하기 원하면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실로 착각과 분열에 빠져 있는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주와 왕뿐 아니라 지혜가 될 필요가 있다.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증폭시켜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성경적 변혁관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노력을 의식하고 있는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는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요 엘리트들의 영역이기보다는 신실한 자들의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의 일부로서 그리고 싸움으로 쉽게 갈라지는 교회의 일부로서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이 문서에 표명된 확신들이 하나님의 보다 순결하고 평화로운 지혜에 의하여 더 정제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말이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그들 자신의 사고에 도움을 받고 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라는 말씀을 따르는 데 격려가 되기를 기도한다.

Ⅰ. 그리스도인의 사회개입

1.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상고할 때는 종종 유치하게 낙관적으로 되거나 암울하게 비관적으로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일부는 이상주의적 비전에 고무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충만가운데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있다고 시사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개인의 죄와 사회의 죄가 실재하며 만연함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사 1:10-26 ; 암2:6-8 ; 미2:1-10 ; 롬1:28-32). 따라서 우리는 이상주의는 단지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여긴다(CRSER보고서 , IV.A).

2.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증가하고 있는 빈곤과 불행, 좌우익 진영의 권력들에 의한 흉악한 억압과 착취, 핵전쟁의 위협과 함께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폭력 등의 현실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된다. 그들은 행성 지구가 자원의 낭비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 거기 사는 인구를 지탱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증가되는 데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눈을 이 세상에서 돌려, 지금 이곳에서의 곤란이 끝나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오로지 주목한다. 우리는 이런 종말관을 가진 그리스도인 계열이 백년 이상 동안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에서 의료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기여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과업을 사나운 바람에 조난 당한 중에 생존한 자를 구출하는 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 견해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약한 자의 송사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들의 권리를 지켜 주며(시 82:3), 정의와 사랑을 행하라(미6:8)는 성경의 명령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3.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정치 및 기타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을지라도, 우리의 비개입이 현 질서에 대한 무언의 지지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사회의 악한 구조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지시하거나 한다. 그 외의 길은 없다.

4.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억압에 직면해서 사회로부터 떠남으로서 현 상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일이 교회 역사상 많이-그리고 현재에도-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혹독한 억압 아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도전할 수 있고 나아가 그들의 생활양식, 비이기적 사랑, 조용한 기쁨, 내적 평안, 인내로 견디는 고통 등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벧전 2:21-25).

5.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회의 가치관에 동조하지 말고 변화시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롬 12:1-2 ; 엡5:8-14).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며 세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우리의 고백에서 나온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다(눅4:5-7). 그러나 사탄은 아무런 고유 권한도 없는 찬탈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께 주어졌다(마28:18 ; 골1:15-20). 비록 그의 주님되심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지만(히2:8), 그는 여전히 세상 왕들의 통치자요(계1:5),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계19:16)이시다. 믿음으로 우리는 옛 질서가 지나가고 새 질서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고후 5:17 ; 엡2:7-10 ; 마12:18 :눅7:21-23).

Ⅱ. 개발뿐만 아니라 변혁을


6.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개발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서구정치 및 사업 지도자들에게는 개발이 국가들과 국민들이 현존 국제 경제 질서의 일부가 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제3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개발주의”(developmentalism)라는, 이념적으로 동기화된 변화 과정으로 정의된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빈곤과 불의의 구조적 상황을 부시하고 종속과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경제적 성장을 기계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7. 그렇지만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개발”이, 성경의 온전한 메시지에 비추어 재해석되면,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해야 할 개념이라고 믿는다. 이런 선택을 하는 부분적 이유는 이 단어가 매우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를 변경하면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8. 이 협의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성경 적인 사고 범주와 연계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또 그 부정적인 느낌 때문에 “개발”이란 말을 다른 말로 대치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대안이 “변혁”(transformation)이다. 그것은 이 단어가 다양한 방법으로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개발이 자기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가정해 왔지만, 많은 면에서 변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사회가 가장 잘 운용된다는 무언의 가정은 청지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도전 받을 필요가 있다(눅 12:13-21, 16:13-15 ; 빌2-4). 공동체적 결속을 기초로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유의 사회들이 그들 존재의 빈곤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9. 더구나 “변혁”이란 용어는 “개발”과는 달리 미심쩍은 과거가 없다. 변혁은 가난한 사람들이 창조시 그들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사회에서 일어나야 할 일단의 변화들을 지적하고 있다.

10. 하지만 우리들은 변혁의 목표와 과정 둘 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에 비추어 관찰되어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결정하는 세속주의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배격하고, 도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리된 관념이, 종종 한 국가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성경 자체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다.

11. 인간의 삶에 대한 성경의 견해에 의하면, 변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가운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태와 반대되는 인간 생존 상태로부터의 변화이다(요10:10 ; 골3:8-15 ; 엡4:13). 이 변혁은 개인과 지역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들을 죄책감과 죄의 능력,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여(롬 5:5),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고후 5:17)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12. 성경에는 우리가 변혁을 이해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도록 돕는 주제들이 많이 있다. 창조론은 모든 남녀노소의 가치와 자연 자원을 보살피고9창1:26-30) 그것을 이웃과 평등하게 나누어야 하는 인류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타락론은 탐욕과 불안정과 폭력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류의 선천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2:2). 속죄론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선포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며 원수된자들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고, 또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해진 정의를 찾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드려지는 생활 방법을 위한 것이다.

13. 우리는 변혁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비전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만유의 주께 복종하는 인간이 되는 이 새로운 길은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것은 편견과 두려움 및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들을 극복함으로써 개인들, 인종들, 국가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 오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식량, 물, 치유수단 및 지식 등과 같은 기초 자원들을 나누어 갖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자신이 주는 것을 똑같게 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서로서로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범사에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Ⅲ. 피조계의 청지기직


14.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지혜롭게 돌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책임의 완전한 의미를 더디 깨닫는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당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관리하고 개선할 다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자연자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종종 우리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광물자원의 보존, 소멸 위기에 처한 동물의 보존, 수많은 천연 서식처의 불안정한 생태균형의 보존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땅은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프리카 속담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서 현재를 빌렸다고 말한다. 우리의 현재 삶과 자녀들의 미래는 우리가 온 땅을 지혜롭게 평화롭게 다루는데 달려 있다.

15. 또한 우리는 우리의 소득과 부의 작은 부분, 십일조만이 하나님께 속하고 나머지는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소유라고 가정한다. 이런 자세는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정체와 역할을 부인하게 한다. 우리는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풍요롭게 “이 생에서 좋은 것들”(눅16:25)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게 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하면 현재 가난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16. 구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건져 올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세계적 공동체 안에 두셨다. 한 몸에 속하였다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나누어서 모든 지체들 사이에 평등함이 있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행 2:42-47).

17. 개인이나 국가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의 자원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신 15:8-9). 변혁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청지기로서 정의를 행하여 자원을 재분배하고 탐욕의 결과를 제한하기 위해 기도와 본을 주장과 항거를 통해 함께 애쓰는 것이다(행 4:32-5:11)

18. 우리는 엄청난 양의 자원을 현재의 무기경쟁에 그릇 사용함으로써 불안을 겪고 있다. 수백만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자원은 갈수록 더 정교한 핵무기를 연구하고 생산하는데 낭비되고 있다. 나아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재래식 무기교역은 국민의 기초적인 필요마저도 무시하는 억압적인 정부의 번창에 수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불의와 침략행위의 새로운 양상을 정죄하며 정의와 화평을 추구할 것을 다짐한다. 이제까지 논의한 피조계에 대한 청지기직 문제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는 전세계의 복음주의 공동체들에게 핵과 무기 교역 문제에 기도하는 자세로 관심을 가질 것과 그것을 연구와 행동 과제에 넣을 것을 촉구한다.

Ⅳ. 문화와 변혁

19. 문화에서 일정한 시기에 특정 지역 또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 신념, 가치관 예술양식, 습관, 법, 사회경제 구조, 사회적 관계, 물질 등이 포함된다.

20. 문화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의 사람들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우리를 창조적으로 되게 만드셨다. 이 창조성이 문화를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이 창조하신 것들의 청지기로 위임하셨다(시 8편 ; 히 2:5-11). 모든 선한 은사가 위에서 말미암고 모든 지혜와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므로, 문화에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의 선물(은사)로 보아도 된다(약1:16-18). 또한 복음을 듣고 순종한 곳은 어디든지 문화가 더욱 고상해지고 풍요로워진다.

21.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거역하므로 범죄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문화는 악으로 오염되어 있다. 우리 문화의 여러 측면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사회구조와 관계들, 예술양식과 법은 종종 우리의 포악함, 상실감, 일치된 도덕적 가치의 상실 등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이 그 창조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므로 “이 세대(세상)를 본받지”말라고 도전한다(롬12:2). 우리는 문화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것을 다시 나타낼 수 있도록 변혁시킬 필요가 있다(롬 12:2).

22. 따라서 문화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마귀의 영향력, 그리고 인간 착취의 기제들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 있다. 우리의 문화 창조성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약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 문화를 사용하셨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와 동시에 그 문화를 복음의 심판에 복종케 하셨다. 우리도 역시 문화를 감사하며 사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복음의 빛으로 검토하여 그 안에 있는 악을 폭로해야 한다(고전 9:19-23).

23. 착취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사회구조는 교회가 적절히 저항하지 않는 죄를 조장한다. 수많은 교회들과 선교회 그리고 기독교 구호 및 개발 단체들이 사회정치적 현 상태를 지지하거나, 침묵으로 묵시적 지지를 보여 주고 있다.

24.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경의 적용을 통해 모든 사회문화적 상황들의 진실을 분별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 문화에 대한 기능주의와 갈등론적 접근 양자로부터 비판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기능주의 사회인류학적” 접근은 다양한 문화들의 조화로운 측면들을 강조하며 현존 구조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지지한다. 이 입장은 종종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다. 반대로 “갈등론적”접근은 사회구조의 모순적 성격을 노출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이익들에 내재하는 갈등을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두 접근법 모두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25. 우리 본성 속에 있는 갈등적인 윤리 성향들을-이것은 우리의 문화체제들에서 드러난다-생각할 때, 우리는 순진하게 낙관적으로 되지도 말고 판단하는 그릇된 자세를 갖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하나님과 동역을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사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마 5:13-16). 우리는 사람들과 그 문화를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로 가져오기를 추구한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사람들이 누리게 될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 안의 그 자유와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계 21:1-22:6).

Ⅴ. 사회 정의와 자비

26. 우리 시대는 다같이 우리로 하여금 빈곤이 필요악이 아니요 종종 불의와 착취와 억압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회, 경제, 정치, 종교 체제의 결과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세계에는 약8억 명이 빈곤에 처해 있으며, 그들의 비참한 상태는 종종 부유한 자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악은 인간의 마음에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시며 악을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롭게 행동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헌신할 것이 긴급하게 요구된다. 교회의 사명에는 복음의 선포와 그의 시범 둘 다가 포함된다. 다라서 우리는 전도해야 하며, 사회 변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과 일치해야 한다.

27.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과업을 생각하면서 에수님께서 당시의 권력 구조에 대해 가지신 태도를 고찰했다. 예수님은 열심당원도 아니셨고 자기 백성에 대한 억압을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동정심에 마음이 움직여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것으로 보셨다(마9:36). 예수님은 자신의 자비로운 행동과 가르침, 생활방식을 통해 사회의 불의를 폭로하셨고 사회 지도자들의 자기 의를 정의하셨다(마 23:25 ; 눅6:37-42). 예수님의 자세는 선지자적 동정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로마와 유대 기존 질서와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 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그의 동정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음을 상기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도전을 받았다(요 13:12-17 ; 빌2:6-8 ; 요일3:11-18).

28.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일에는 국내든 국외든, 또는 동서남북 어디든, 언제나 큰 희생에 따르며, 또 그것이 우리를 핍박과 죽음에까지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는 것을 알고,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편안함,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맡길 수있게 되기를 겸손히 하나님께 구한다.

29. 이따금씩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즉 우리의 자선 행위를 그들의 운명 개선에 국한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그 이상 나아가 그러한 자선행위를 필요하게 만드는 불의를 교정하려고 해야 하느냐 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후자는 우리가 사역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어떤 경험법칙도 없지만 다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자비와 정의는 같은 것에 속함이 분명하다(사 11:1-5 ; 시 113:5-9).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역에 양자를 결합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야 하며 기꺼이 그 결과를 감내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선 행위는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와 관계에 있는 불의를 지적하여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로 하여금 권세를 잡은 자들에 대항하게 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행 4:5-22).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히 13:3).

30. 우리의 정의와 치유사역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쳐야 한다(마5:43-48). 우리가 이방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자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정부의 법과 정책은 그 특징이 정의여야 한다.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행동은 전도와 분리될 수 없다.

31. 현대 세계의 불의는 세계적인 규모에 이르렀다. 우리들 중 다수는 국제적인 기업에 지배받는 나라 출신이고, 일부는 정치체제가 그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는 나라 출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국민들, 특히 가난한 자 중 가장 가난한 자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목격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연구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한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한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Ⅵ. 개교회와 변혁


32. 개교회는 기독교 집단의 기본 단위이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 인정하며, 개인적으로와 공동체적으로 천국의 가치관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섬김의 사역을 구현함으로써, 변혁을 체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막 10:34-45 ; 벧전 2:5,4:10). 오늘날도 변혁된 삶을 사는 이와 유사한 예가 전 세계의 교회에 무수하게 달려 있다.

33. 우리는 개교회가 대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 왔으며, 그들의 일차적 역할은-비록 유일한 역할은 아닐지라도-삼중 사역, 즉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찬양,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영접한 사람들을 양육, 교육, 제자화 하는 일-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여 변혁이 그리스도인 개인, 가족, 공동체에 일어난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변혁의 필요성과 실제를 나타내 보인다.

34. 모든 교회는 종종 사회의 악을 공개적으로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어떤 선택을 하든 목적은 교회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교회의 주님께 순종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경솔히 말하여 그 증거가 비효과적으로 되게 하거나, 말해야 할 때 침묵함으로 그 선지자적 소명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다(벧전 3:13-17). 만일 우리가 성령께 민감하고 사회적 의식이 있으면, 늘 사회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눅 18:24-30).

35. 개교회 지체(구성원)들의 태도와 생활방식 변혁을 위해서는 정직, 지도력, 지식이 필수적이다. 교회는 이웃 사람들이 돈을 쓰는 방법 때문에 삶에 압력을 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종종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의 고난과 인간의 필요보다는 이것을 더 의식한다. 그들도 역시 가끔씩은 세계적 필요를 체험하거나 그들의 안일에 도전하는 정보를 접하기를 꺼린다. 만일 교회의 지도자가 못한다면, 교회 지체들은 종종 이런 문제들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딤전 3:1-7 ; 히 13:17).

36. 우리는 개교회내의 필요에 민감하고 부응해야 한다. 과부, 갇힌 자, 가난한 자, 이방인 등은 특히 개교회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갈 6:10). 우리는 지역 주민의 필요를 잘 알고 그러한 필요를 채우는 데 있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우리 교회의 지체는 아니지만 동일 지역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를 추구해야 한다(약 1:27 ; 롬12:17).

37.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와 그 이상의 사회에 있는 악과 사회 불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연구, 진지한 기도,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인 행위의 규범적, 윤리적 지침내의 행동 등이다. 정치체제가 어떻든 때로는 이러한 지침내의 항거가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항거하는 문제와 방법을 세심히 생각하여 교회의 정체와 메시지가 더럽혀지거나 유실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38. 그렇지만 개교회는 우주 교회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지역과 환경 속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교제(koinonia)에 기초한 도움과 나눔(diakonia)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연결시키는 모델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교회간 짝짓기”에서는 상호관계가 어떤 형태의 온정주의도 아닌, 양편에서 주고받는 진정한 호혜관계여야 한다(롬 15:1-7).

39. 모든 개교회가 늘 환경과 타협할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진정한 상호관계의 정신 가운데 호혜적 관계를 갖는 것이 특별히 필요하다(롬 12:3-18). 어떤 교회는 물질주의와 인종주의의 문제에 빠져 있고, 다른 교회들은 억압과 폭력의 문제에 빠져 있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시도함으로써 피차 도울 수 있다.

40. 보다 광범위한 세계 지역사회에 관해서, 기독교 교회는 개인적 특성, 훈련, 그리스도인 성장 등에서 그리스도와 파송 교회의 이름 하에 타문화에서 일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찾고 교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특징 지워지는 종과 청지기로 가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간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과 동역 하게 될 것이다.

Ⅶ. 기독교 원조 단체와 변혁

41. 우리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고찰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개교회의 중심적 위치를 인식하였다. 전 세계의 교회들은 전 역사에 걸쳐서 자기 주위에 있는 필요들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 왔으며, 곤핍한 자를 계속 섬겨 왔다. 우리는 원조 단체들이 그들의 역할을 교회로 하여금 그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라고 보기를 촉구한다.

42. 우리는 근년에 와서 복음과 그것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이루어진 진보를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증거에 결함이 있음을 인식하며, 우리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보다 잘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긍정한다.

43. 우리는 원조 단체의 후원자들이 대체로 인간의 고통과 기아와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관심이 올바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인식한다. 기름을 모으려는 노력 가운데, 가난한 자들의 상태가 종종 기부자의 필요와 기대를 채우기 위해 착취되는 경우가 있다. 모금 활동은 반드시 복음과 일치해야 한다. 단체의 청지기직 책임은 사역을 위한 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경상비를 현저히 줄이려는 것이다.

44.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원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긍정적 변혁을 우리 조직 안에서 수행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일례로, 우리는 동일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경쟁을 피해야 하고, 또 약하고 “비성공적인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망각하는 의기양양한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갈 2:10 ; 시 147:6).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검토하여 성경적 완전과 교회 및 다른 단체들과의 진정한 동반관계를 확보해야 한다. 자원 이용 방법을 포함하여, 사역 정책에 대한 결정은 봉사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의 협의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45. 우리는 우리의 촉진 활동이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을 나타내도록 확인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변혁이 현장에서 체험되는 방법의 완전한 의미를 우리의 기부자들에게 교육시킬 책임을 받아들인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 사역으로 인도하셨다. 교육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이 과정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접근법에 의문을 품게 함을 알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교육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46. 우리가 실행하는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과 사랑 가운데 우리가 섬기려 하는 지역사회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이다(행 14:17 ; 17;23 ; 롬2:9-15). 그러므로 원조 단체들은 이들 지역사회의 관심을 주의 깊게 듣는 일에 적절한 우선 순위를 두어, 쌍방 커뮤니케이션과 프로그램의 지역 소유를 촉진하여야 한다. 주된 원리는 지역 주민과 서구 단체들이 함께 협력하는 평등한 동반관계이다. 개발을 위한 많은 모델들이 제3세계에서 창안되었다. 기독교 원조 단체들은 모든 면에서 이들 지역 주도권이 성공하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구속받은 천국 공동체는 일단의 변혁 모델들을 시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7. 원조 단체들이 기부자들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합법적인 필요는 종종 서구의 경영 체제를 지역 사회에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서구식 기획 및 통제 체제가 책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라는 것이다. 이들 단체가 봉사하려 하는 지역 사회는 흔히 다른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강요는 민감한 사회 변혁 과정을 제한 억제할 수 있다. 우리는 두 문화 모두에게 책임지는 체제를 만들 수 있도록 원조 단체들이 그들이 섬기려는 사람들과 대화를 확보하기를 촉구한다. 우리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우리의 상호 의존을 반영하여야 한다(롬 14:17-18 ; 고전12장).

48. 기독교 단체로서의 우리의 활동에 대해 명백히 상반되는 요구가 있음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타협을 의식한다. 우리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부조화의 자제와 우리의 개인적 조직적 삶에 있어서의 사치를 포함시킨다. 우리는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변혁의 참대행자로 만드시기를 구한다(행1:8).

Ⅷ. 천국의 도래와 교회의 사명

49.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와 미래, 사회와 개인, 육체와 영, 모두에 해당된다고 확언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현재, 사회, 육체를 지나치게 강조했더라도, 우리는 성경 메시지의 그러한 차원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왔음을 즐겁게 선포한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처럼 현시대를 판단하고 변혁시키면서 성장하고 있다.

50. 역사 안의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에 초점을 맞추었다 할지라도,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에 초점을 맞추신 것은-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듯이-열방에게 복주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창 12:1-3, 15장, 17장 ; 사 42:6). 따라서 교회는 주님과 인류를 위해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마22:32-40).

51. 교회는 세상에 이 시대 및 오는 시대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의 소망은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소망하는 것은 현재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니다(롬 5:1-11). 오히려 우리가 미래에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과 또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완전한 구속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날의 도래에 대한 보증으로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전 15:28). 우리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소망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무시무시한 산통을 겪는다(롬8:22). 종말을 고대하는 말세의 공동체인 우리는 종국 전단계(penultimate)에 참가함으로써 종국을 준비한다(마 24:36 ; 25:46).

52.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힘차고 충만한 사명에 우리 자신을 바쳐서, 폭발적인 창조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실함을 함께 작은 일에 드리도록 도전 받는다. 우리의 사명과 비젼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도로 성장하여야 한다(딤후 3:16). 회개하여 부흥되고 활기찬 교회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들이 악과 불의의 세력에 도전하도록 무장시킨다(딤후3:17).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단순히 영원한 미래로 귀속시키거나 또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정치사회 질서와 동의어로 여기거나 하지 않고 전진한다. 성령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을 섬기고 선포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엡 1:10,20-22).

53. 마지막으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함을 고백한다. 우리는, 변혁은 결국 하나님의 일이지만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일에 종사하게 하셨음을 긍정한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히 뛰어난 변혁자이신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의 상담자가 되게 하시며(요 16:7), 그의 많은 은사들을 우리에게 주게 하셨으며(롬 12장 ;고전12장), 우리를 무장시켜 원수에 대항하여 정복하게 하셨다(고후 10:3-5 ; 갈 5:22-23). 우리는 우리가 지배하지 않은 죄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부족이 성령님을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엡 4:30 ; 갈 5:13-1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의 나라- 가 임하게 하는 즐거운 일에 동참하는 특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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